If life gives you a lemon, make lemonade
생은 내게 시어빠진 레몬 따위나 줄 뿐이지만
나는 그것을 내던지지 않고 레모네이드를 만들 것이다.
엄마의 모습은 내 상상 속 이미지와는 달랐다. 완고한 고집과 독특한 개성이 귀퉁이 무너진 성곽처럼 흐려지고
예상치 못했던 표정이 새로운 양식처럼 그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엄마에게 더 다가가 섰을 때 나는 엄마가 아름다워졌다는 깨달았다. 세상과 맞서기만 하던 경직성이 풀리고 애처롭고 외롭고 지친 모습은 스며든 듯 사라졌다. 엄마는 편안하고 맑고 어딘지 더 깊었다. 언뜻 보면 불행 따윈 겪은 적이 없는 행복하고 예쁜 아줌마로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 예쁜 아줌마는 색마른 빛을 품고 있어서 주변과 결코 뒤섞이지 않았다. 엄마는 비밀스러운 정원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호젓했다. - 24p
사람은 누구나, 아무리 못난 인간이라 해도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다.
새삼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자기중심적인 꿈을 통해 그 사실을 학습한다. - 46p
말은 늘 그런 식으로 끊기게 마련이었다. 가족간의 소박한 대화로는 더 이상은 소통할 수 없는 경계에 이른 것이다.
일상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적 고뇌를 가족과 나누는 것은 무리이다. 일상과 존재의 경계에서 가족간의 절망이 생겨나는 것이다. - 95p
봄이란 하나의 계절이라기보다 겨울과 여름 사이의 격력한 신경전 같다. 비와 바람과 햇빛과 눈이 서로의 매력과 무기를 동원해 밀고 당기고 엎치락뒤치락거렸다. 한겨울같이 기온이 떨어졌다가 삼월 마지막 날엔 깃털 같은 바람이 목덜미를 간질이더니 사월 첫날에는 눈이 내렸고 다음 날엔 황사 때문에 모든 것이 바랜 사진처럼 누렇게 보였다. 그런 날은 의식초차 현실감각을 잃고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그사이로 개나리와 목련, 벚꽃이 귀신들처럼 피어났다. 꽃은 한 송이 한 송이마다 자기의 세계가 하나씩 생긴다고. 사람도 그렇게 자기를 꽃피워야 한다고. -116p
사실 여성호르몬만으로는 단순할 뿐 아니라 진부하다. 우린 좀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이미지와 개인차가 선명한 이목구비의 비율과 피부의 밀도와 촉감과 강도와 빛, 그리고 느낌과 향기를 선호한다.
여성적인 외모의 내면을 물결치며 흐르는 남성호르몬의 미소아 향기라든가, 남성적 외모 속에서 되비치는 여성적 향수의어른거림 같은 거......... 거기엔 무수한 색과 질감과 이미지의 순열과 조합의 환상과 종의 역사에 대한 경이가 있다.
이젠 생물학적 여성이나 남성이 아니라, 문화사회적 인류로서 여성이거나 남성을 스스로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아직도 생물학적인 여성으로만 머물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글쎄, 애 둘쯤 낳고 전업주부로 세월 모내다간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아줌마로 도태되어 긴긴 잉여의 세월을 한숨만 쉬며 보내야 할걸......
그거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타락이 아닐까? 빌어먹을, 맞긴 하지만, 난 너무 앞서가는 게 문제다. - 146p
"축하해.
넌 언젠가 엄마가 될 수 있단다"
엄마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내게 시작된 일이 축하할 일만은 아니란 것을 난 알아들었다.
"이제 너 자신을 더 잘 보호해야 한단다. 네가 엄마가 될 준비가 될 때까진 아주 조심해야 해.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건, 네가 원하지 않거나 피임이 준비되지 않은 섹스는 하지 말라는거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잘 통제해야 해. 부주의하게 성행위를 해 원치 않을 때 아이를 갖게 되는 건, 네게도 아이에게도 굉장히 불행한 일이야"
"생리를 하게 되면 좀더 여성적이 될 수 밖에 없어. 비밀이 생기는 거니까. 예민해지게 되고 불쾌하기도 하고, 불편하고 열등감을 느끼게 되지.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하고, 단정하게 행동해야 하고 더 위생적이 되어야 해. 흔적을 남기지 않더라도, 잘못하면 냄새를 피워 남에게 폐를 끼칠 수 있어.
앞으로 대략 삼십오 년 동안이나 매달 치르게 돼. 그렇다고 익숙해지는 건 결코 아니란다. 매달 문제적이지 .내 말 이해하겠니?"
엄만 내가 알아듣든 알아듣지 못하든, 일단 말하는 게 낫다고 결정한 듯 했다. -153p
"삶은 사랑의 열정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로 사는 거거든."
그리고 평생 계속될 것만 같이 단단하게 뭉쳐서 희끗한 형체의 유령처럼 등 뒤를 따라다닌 감정의 응엉리도 때가 되면 결국 재처럼 부서져 흩어지겠지. 단둘만의 달나라를 보았던 동질성조차 겨우 이 년 혹은 삼 년 정도면 무화되고 타인이 되는 것이다.... 진짜 상실의 아픔은 그것이다. 평생 계속되는 감정은 아무것도 없다. - 195p
"너만할 땐 네 자신이 만든 울 일 같은 건 아직 없어. 네 잘못 같은 건 없ㅇ어. 엄마가 만든거야.....네가 우는 건 전부 엄마가 잘못해서 우는 거야. 무슨 일로든, 네가 운다면 그건, 다 엄마 때문이야. 다, 나 때문이야."
- 201p
"이 사람이라면, 내게 상처를 입혀도 괜찮아. 이 사람이라면, 내게 잘못을 해도 좋아..... 그런 마음이 생겼을 때, 네가 아저씨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어.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하면 상처가 많이 생긴단다. 다른 여자에게 시선을 주어도 마음이 아프고 헤어질 대 한번 더 돌아보지 않고 총총 가버려도 상처를 받지.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상처가 되고 언젠가는 우리가 죽을 거라는 사실도 상처가 돼. 인간인 모든 게 선물인 동시에 상처가 된단다. 우리가 인간이어서 하는 잘못들과 불가향력을 승낙하기로 한거야."
- 204p
나는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훌쩍훌쩍 운 적이 있었다. 팔십 년대 5.18과 학생운동을 배운 시간이었다. 하필 팔십년대에 스무 살이 되어 십 년을 보낸 청춘들이 가여워 울었었다. 아빠와 엄마를 포함해서. 나도 그때 태어났더라면 역사 밖으로 도망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도 역사 밖으로 도망칠 수는 없다. 역사와 무관한 듯 산다는 것은, 삶의 온실 세계로 도피해 자신을 최대한 소외시킨 비존재로 사는 일이다.
훗날 내가 청춘을 보낸 이 시대는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규정될까?
훗날 누군가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역사책을 펼치고 울어줄지 모른다. 지독히 세속적이기만 했던 저성장시대의 우울한 청춘들을 위해. - 216~217p
"부모가 내게 무슨 짓을 했건, 우린 그것을 원망하기보다 극복해야 한다.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부모의 운명을 가엽게 여기고 자신의 자아를 강화하는 것이다. 자기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을 긍정하며 스스로를 키워야 한다.
알고보면, 모든 부모는 자기 인생의 많은 부분을 후회한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들의 최선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게 아니라 그들의 불가능성과 실패와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는 시행착오 속에서 잉태되고 줄생하고 성장해 부모의 운명을 온몸에 덕지덕지 묻힌 채로 분가하는 것이다.
.................
예컨대 내가 알아낸 비밀은, 어떤 부모든 바로 그 아이, 즉 나 자체를 위해 아이를 낳은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우린 누구나 지나가는 과격에 불과하다. 난 그것이 지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 218~219p
"<공산당 선언>같은 것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빛을 보낸다는 거야?"
"글로벌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물질에 농락당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존재하려면, 마음과 생각 속에서 우선 착취의 사슬을끊어야 해. 말하자면, 더 가질 수 있고 더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공존의 선을 가져야 하는 거야. 진짜 삶은 욕망의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가 아니라, 욕망이 멈추는 공존의 선 위에서만 가능해. 너도 그 선을 찾아야 하고." - 233p
"사람은 자신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어서 외로운 거야.
사람이란 관계 속에서 가장 사람답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누구나, 일 년에 한 달쯤은 완전히 혼자 지내보는 것도 좋을거야. 여행을 가라는 게 아니야. 자신의 일상을 그대로 하면서 가능한 지인을 만나지 않고 묵묵히 홀로 생활을 해보는 거야. 자신의 원형을 생생히 느끼면서, 이곳과 자신을 만끽하면서."
엄마는 자신만의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얼마간 일러스트 작업도 하고 자신을 위해 요리도 하고, 넉넉하지 않지만 꼭 쓰고 싶은 데에는 돈을 쓰고, 언제든 외출하고 어디든 가며 누구든 만났다. 무엇보다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사유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참으로 사치스러운 삶이 아닐까? 여자로 성장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웠고, 사랑도 한 뒤에 이제 한 인간으로서 독립적으로 자신을 만끽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271p
"사랑이 오래되어 열정이 바닥에 가라앉으면 드디어 조금 심심한 듯, 우아해진단다.
아저씨와 난 이성적으로 다시 시작하는 거 같아." - 275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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