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 도서관에서

최소한의 사랑 - 전경린 장편소설 -

아라모 2024. 1. 12. 16:32

 

 

원장은 노인들을 아이 다루듯 하며 다정함과 자상함을 과시했는데 어딘가 심술이 배어 있었다.

흔히 말하는 정이 많은 부류였지만 내 눈에는 계산적인 여자로 보였다. 상반된 두 단어는 오늘날 같은 말이다.

정이란 보이지 않게 계산된 이익의 가시적인 산출량인 것이다.    -  10p

 

대체로 오후 6시 무렵이었다.

세상이 변색하듯 그늘지며 아직은 어둡지도 않고 눈부시지도 않아 오히려 분별이 선명해지는 시간이었다.

성급한 사람들이 벌써 불을 켜고, 아직 약속이 없는 사람들이 안절부절못하는 그 시간에, 낮과 밤의 틈새가 벌어지며

제정신이 들듯 바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찾아드는 익숙한 슬픔.....

발을 빼고 싶은 후회와 비슷하고, 착각과 과오의 결말부와 비슷하고, 반복하고 싶지 않은 일을 또다시 시작하는 환멸과 

비슷하고,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절망과 자책의 감정과 비슷했다. 찾아가야 할 진짜 세계가 다른 곳에 있는 듯한 희미한

자각증세와 소금처럼 짠 슬픔과 이름 지을 수 없는 불안에 의식이 잠식되어갈 때에 낮 동안 딛고 산 허구의 단층 하나가 푸석 주저 앉으며 저쪽 세계에서 불어오듯 커다란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큰 옷깃이 펄럭이면 이런 소리가 날까...

                                       -  80p

 

남편이 나와 함께한 사랑을 다른 여자와 또다시 하게되면 어쩌나.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하나 ....

마침내 내 상념은 거기에 이르렀고 남편과 나 사이의 사랑이 과겅늬 일인 것을 깨닫고 말았다. 우리의 사랑은 지나간 일이었다. 우리 사이에 흐르는 강물은 이미 말라버렸다. 어떤 여자들은, 새 여자를 무찌르고 남편을 지키겠다고 다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결심할 수 없었다. 그가 다시 사랑에 빠진다면, 자기 스스로 비난할 수는 있어도 타인이 비난할 수는 없을 뿐 아니라, 누구도 그 사랑의 기회를 박탈할 수 없었다.           -   84p

 

목련의 꽃봉오리는 모두 북쪽을 향해 맺히고 목련꽃 모두 북쪽을 향해서 피는데, 사람들은 그 이유를 모르겠다며 이상한 일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세상에 이상한 일이란 없다. 우리가 모르는 일이 있을 뿐이다. 내 생각에 목련은 천천히 피어야 하기 때문에 차가운 북쪽을 향해 피어난다. 일단 피어난 목련은 꽃잎이 너무 커서 햇살이 조금만 따스해져도 헤벌어져 금세 누렇게 변하며 낙하한다. 그러니 목련은 조금이라도 늦게 지기 위해 햇빛을 아끼며 천천히 피어나야 하는 것이다.  - 97p

 

삶에는 인간을 파멸시키는 무서운 것들이 매복되어 있다. 다정하게 호객하는 자본주의 꽃인 주식과 부동산 투자, 담보나 카드사 대출, 그리고 삶 위에서 춤을 추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양날의 칼들, 대부분의 사람은 자본의 호객행위에 속고 제 착각에 속고 소망과 믿음과 애정행각의 꿈속을 헤매고 그리고 열정의 이름으로 자기 주변의 사랑할 것들을 모두 파괴한다. 그리고 사랑은 없고 사랑하지 않고는 덮을 수 없는 남루하고 추운 삶이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 178p

 

그곳에 서면 누구라도 그 단순성에 놀랄 것이다. 그 잔인하도록 단순한 경계는, 단지 20세기 세계 냉전의 무책임한 결과물일 뿐이다. 실체는 사라졌는데 왜 우리는 눈을 가린 수건을 벗지 못하고 이 구덩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   218p

 

그에 따르면 사람도 일도 생명도 매사가 인연이고, 인연이란 물질이 물질을 당기는 힘 자체였다.

인연의 순리에 비하면 이성도 주관도 객관도, 지식도 경험도 미망 속의 미망에 지나지 않는다. 믿을 것이라고는 인연을 느끼며 다가오는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성실과 겸허함뿐이다     -  225p

 

거짓말이면 어때? 넌 신화와 설화를 믿니? 다 지어낸 이야기인 거야. 불교의 핵심이 그거쟎아. 인생도 그래.

다 지어내는 거지. 사랑도 다 지어내는 거야. 하지만 산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지어낸 것을 사실로 만들어가는 일이지...

                                                           - 245p

 

"하나의 사랑이 끝나면, 내가 속에서 무너져 아득히 사라지는 것 같아요. 내가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아요. 이제 난 사랑을 할 수 없을 거 같아요"

............

"혜지 씨는 다시 사랑을 할 거예요. 폐쇠된 방문을 여는 열쇠처럼, 누군가 당신의 진짜 이름을 부를 거예요.

그러면 사라졌다고,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자신이 여전히 신선하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발을 딛고 일어나 자기 속에서 가만히 걸어나올 거예요. 봄비에 젖은 어린 잔디 위를 맨발로 밟듯 신선할 거예요. 그리고 서로의 본 모습 그대로, 물길이 천천히 꼬불꼬불 휘어지며 흘러가듯 서로를 찾아가지요. 사랑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표현하는 일이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예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    290p

 

고통에 이유가 있다고 여기고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도 때로는 살아가는 방법이지요        -    341p

상담사는 사람들이 한 이야기를 잘 접어서 종이배를 띄우듯 세상사의 강물 위로 띄워 보내는 사람 같았다.

사람들은 대체로 마음에 담고 있기 버거운 말들을 털어놓기 위해 이곳을 찾아오고 어느 때는 받아들여서 문제를 해결하고 어느 때는 간소하게 만들어가고 또 어느 때는 문제를 내려놓고 조금 쉬었다가 간다. 어느 쪽이든 나쁠 것은 전혀 없었다.

...............

"나는 모든 문제를 최소한의 것들을 되찾게 해서 풀지요 난마처럼 얽히는 이 많은 고통과 상처가 실은, 가장 최소한의 것을 지키지 못해 생기거든요. 자신 속에서도 그렇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그렇고요. 부모 자식 사이에, 부부 사이에, 적과 적 사이에, 개인과 이 사회 사이에, 개인과 나라 사이에, 나라와 나라 사아에......"

나는 마침내 이 상담사에게 손을 들었다. 그는 상담사로서 확실히 재능이 있었다.     -  342p

 

"최소한의 사랑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미니멈 사랑이다."

모르는 타인과 타인의 사랑이며, 인간과 세계의 사랑이다.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었던가. 아니다. 이 말은 소설을 통해서 낳아졌다. 가장 최소한의 것들을 지키지 못해 세상엔 이토록 많은 고통과 상처가 난마처럼 얽히는 것이다.

최소한을 지키기가 이렇게도 어려운데, 왜 우리는 최대한의 욕망에 휘둘려 혼란에 빠지는 것일까.            <작가의 말>중     -   36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