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 도서관에서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 김영민 -

아라모 2023. 12. 6. 14:20

 

 
허무한 인생과 더불어 사는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생은 허무하다. 허무는 인간 영혼의 피 냄새 같은 것이어서, 영혼이 있는 한 허무는 아무리 씻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인간이 영혼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은 인생의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인간의 선의 없이도, 희망없이도, 의미 없이도, 시간을 조용히 흘려 보낼수 있는 상태를 꿈꾼다.
 
인간은 생식이란 과업 이상을 꿈꾸게 되면서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 인간은 번식에 그치지 않고 번식 이상의
의미를 찾으면서 인간이 되었다. 인간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면서 인간이
되었다. 인간은 양육강식에 반대하고 인간의 선의를 발명하면서 인간이 되었다.
                               - 허무를 직면하다 중 -
 

나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화폭보다는 수평선을 그리거나 찍은 작품에 매료된다. 

그러한 수평선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굳이 강변할 필요가 있을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기에 

원한다면 당신이 무엇인가 담을 수도 있다. 인생에 정해진 의미가 없기에, 각자 원하는 의미를 인생에 담을 수 있듯이. 

그래서였을까.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나 안겔루스 질레지우스 같은 신비주의자들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부재 혹은 없음 속에서 하느님이 인식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지전능의 하나님을 '없음'이라고 불렀다. 

무엇인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곧 어떤 한계와 장애를 의미하므로.   -  43p 수평선을 보다 중  -

 

앙리 마티스 <이카루스>.   삶은 악보가 아니라 연주다 중 -

 

인생의 행로는 정해져 있다. 자연의 길은 하나뿐이, 그 길은 단 한 번만 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인생의 각 단계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 소년은 허약하고, 청년은 저돌적이고, 장년은 위엄 있고, 노년은

원숙하다. 이 특징들은 제철이 되어야 거둘 수 있는 자연의 결실이다  -키케로, 노년에 관하여-

작자 미상. <플로라> 폼페이 유적에서 발굴된 벽화의 부분   -  노년을 변호하다 중  -

 

구름은 소멸의 약속이다. 구름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16세기 중국의 사상가 왕수인은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완벽한 양심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그러자 사람들이 어이없어하며 대꾸했다. 세상에 들끓는 저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진상들은 다 뭐죠? 왕수인이라고 그 진상들의 존재를 모르랴.그러나 왕수인이 보기에 그들의 욕심 뒤에는 어김없이 

도덕적인 양심이 있다. 다만 욕심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 왕수인의 제자 우중이 나서서 정리했다.

"양심은 안에 있으니 결코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이기심이 양심을 가리는 것은 마치 구름이 태양을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태양이 어찌 없어진 적이 있겠습니까" 

노력하기에 따라 인간의 이기심을 없앨 수 있다고 보았기에 이기심을 구름에 비유한 것이다. 구름은 언제고 소멸할 수 있는 존재다.   - 165p 구름을 본다는 것은   중 -

르네 마그리트, < 거짓 거울> 

 

전 소식, < 절지묵죽도두방 >   모사를 넘어서 중  -

 

희망, 자신감, 정의 등 제로섬적 경쟁이 작동하지 않는 영역에 눈을 돌릴 수 있으려면, 세상에는 다원적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그리고 그 다양한 가치들에 자유자재로 눈을 돌리고 다양한 영역을 가로지를 수 

있는 마음의 탄력이 필요하다. 경쟁, 아니 경쟁의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파이의 확대나 용망의 제거나 

공정한 시험 못지않게 경직되지 않은 마음의 탄력이 중요하다  -  220p 경쟁할 것인가, 말 것인가 중  -

 

사랑은 무엇이고,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을 인간이 알 수 있을 리야. 사랑은 이익의 계산을 넘어선 곳에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인간은 모른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향한 통로다. 그것이 

바로 대성당이다. 그 통로를 대성당이라고 불러도 좋고, 사원이라고 불러도 좋고, 절이라고 불러도 좋고, 섯ㅇ소라고 불러도 좋다. 혹은 '가람'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일본의 불문학자 호리구치 다이가쿠는 <전시 조종사>의 한 구절을 '다 지어진 가람 안의 당지가나 의자 대여 담당자를 하려는 사람은 이미 그 순간부터 패배자다' 하고 번역했다.

          - 247p  대성당을 가슴에 품다  중  -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설치작품 <저장소: 카나다>  삶을 유희하다 중  -

 비올레타 로피츠,<할머니의 팡도르> 에 실린 삽화 .

할머니의 팡도르는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은 삶에서 달콤함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 그 달콤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죽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세대에게 달콤함의 레시피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할머니가 사신에게 며칠동안 기다려달라고 했던 것은 부질없는 목숨을 그저 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인생을 즐기고 싶은가. 그렇다면 좋아하는 대상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환멸을 피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좋아하는 대상에 파묻히지 말아야 한다. 대상을 좋아하되 파묻히지 않으려면, 마음의 중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마음의 중심은 경직되어서는 안된다. 경직되지 않아야 기꺼이 좋아하는 대상을 받아들이고, 또 그 대상에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

          - 274p 인생의 디저트를 즐기는 법 중  -

 

음식을 과감하게 찾아다니다 보면, 맛있다 못해 신비하기까지 한 기분마저 느낄 때가 온다.

언제였던가, 짜장면이 너무 맛있는 나머지 신비하게 느껴졌던 적이 . 그렇게 맛있는 짜장면은 향정신성 약물로

분류되어야 한다, 하나 이상의 음식을 먹을 때는 과정의 서사를 즐겨야 한다. 코스요리에서는 횡적인 기승전결을 누리고, 한상차림에서는 거대한 화폭을 감상하는 자세를 갖춘다.  - 281p  잘먹고 잘 사는 사회를 향하여 중  -

 

도미니크 울드리 촬영. 로베르트 발저가 마지막을 맞이했던 산책로.

 

내가 산책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산책에 목적이 없다는 데 있다. 나는 오랫동안 목적 없는 삶을 원해왔다.

왜냐하면 나는 목적보다는 삶을 원하므로, 목적을 위해 삶을 희생하기 싫으므로. 목적은 결국 삶을 배신하기 마련이므로,

꼭 목적이 없어야만 한다는 건 아니다. 나는 목적이 없어도 되는 삶을 원하다. 나는 삶을 살고 싶지, 삶이란 과제를 수행하고 싶지 않으므로.    - 목적이 없어도 되는 삶을 위하여 중  -

지나친 여가는 인간을 공허하고, 무료하고, 빈둥거리고 낭비하게끔 만든다. 노동을 없애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노동의 질을 바꾸는 것이 구원이다. 일로부터 벗어나야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을 즐길 수 있어야 구원이 

있다. 구원은 비천하고 무의미한 노동을 즐길 만한 노동으로 만드는 데서 올 것이다

        -  삶의 쳇바퀴를 사랑하기 위하여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