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 도서관에서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 이병률 -

아라모 2023. 8. 30. 16:58

 

사랑은 한 사람과 한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다.
한 덩어리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각자의 이야기일 뿐이고
그래서 슬프고 충분히 쓸쓸하다.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미지근한 감정의 부스러기만을 건네려 할 때도, 
어떤 힘있는 표현은 그 한 사람을 살게도 합니다. 
사랑이 그렇습니다. 짧게 줄여진 말이나, 직접적으로 하지 않은 말들 속에는 마치 
뭔가가 발견되기를 기다렸다는 듯 우주가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
사랑이 그렇습니다.             - 26p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박연준 시인은 <쓰는 기분>에서 기적이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일"
이라고 대답하겠다고 했다.
그만큼 기적은 일어나는게 아니라, 닥쳐오는 게 아니라, 기적은 우리와 영원히 상관없는 일.
                               -   30p

사랑이 무엇이라는 걸 알려주는 이가 없고, 세상엔 사랑을 가르쳐 주는 교실도 없었기에 당신은 물감을 짜놓고
막막해할 뿐 도화지에 점 하나조차 찍을 수 없다.
그러다 사랑은 배워서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어느 날에는, 그래서 사랑을 제대로 진행할 수 없는 어느 날에는
체기를 누르고 누르다, 그저 흐릿하게 주저앉게 되는 것이다      
.................
사랑을 배운 적이 없어서, 사랑을 하지 못하는 당신이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도, 세상은 사랑의 풍경을 보여주며
페이지를 넘긴다. 그러니까 당신아, 우리는 그 페이지를 따라 여행해야 하고, 그 길에서 나 자신을 에워싼 모두를 
괴롭혀서라도 영혼을 다 소모할 수 있을 때만 이번 생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주인공 말고 주인이.    - 48~49p
 

누구나 한 달을 살고 싶어한다. 한 달은 이제 어떤 자격의 단위가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 달 사는 것,
길을 잃어서 우연히 걷게된 예쁜 골목에서 살 집을 구해 살아보는 것, 뭐든 한 달만 가져보는 것,
뭐든 한 달만 부벼보는 것, 어떤 날은 공터에다가 동그라미를 커다랗게 그려놓고 그 안에 넣어야 할 것들과 그 밖에
배치할 것들을 떠올려보는 일도 해야겠다. 그 동그라미 안에 모래로 집을 지었다가 그 집을 허무는 것도....
나는 그곳에  살면서 문명을 만들 것이다. 아름다움을 격하게 느끼고는 나 또한 그렇게 문명이 되리라.
그곳에서 당신과 한 달만 살고 싶다. 그렇게 한 달만 깨어 있고 싶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겠다.
잠결에 맞닥뜨린 당신을 와락 안고 싶다. 바람만 불어준다면, 그 바람에 꽃잎이 몇 장 실려와준다면 나 잠시 
그곳에서 죽고 싶다.     -   76p
 
사랑은 보이지 않는다.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기도 하며, 나의 경우에는 행동이 크지도 않을뿐더러 표정이 너무 드러나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눈 내리는 날, 하늘을 가득 채웠던 눈이 금세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벚꽃으로 가득했던 
거리의 열기가 하루아침에 마침표를 찍는 것처럼, 사랑은 좀처럼 스스로를 보여주지 않는다.
사랑은 들리지도 않는다. 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소리가 너무 작아서일 것이다. 계곡에 꽁꽁 언 얼음 밑으로 나지막이
흐르는 물소리, 어쩌면 저 먼 바다 밑으로부터 고래가 나를 향해 잘게 잘게 헤엄쳐오는 소리, 그처럼 들을 수가 없다.
사랑은 무슨 맛이라고도 정의할 수가 없다. '무미'라는 의미의 말처럼 '맛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맛은 있다.
하나의 맛으로 구성된 것도 아니며, 그 여러 맛의 조합을 하나하나 분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어떤 맛이나 냄새라고 특정할 수 없어서다. 겨울날,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의 아스라한 맛을 닮기도 했으며 바람의 맛과, 이른 아침의 산 공기까지도 
닮은 냄새라면 어떤가   
.....................
사랑은 상대에게 좋은 목소리를 내려는 욕구를 샘솟게 하며, 하물며 길가 담벼락 틈새에서 피어난 식물 하나를 보게 하기 
위해 몸을 낮추라고 시킨다. 나를 , 당신을, 세상을, 세계를 그렇게 만들지 않는다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모든 순간을 창조하는 일이 사랑이기 때문이고, 그것은 아주 자주, 그만큼 엉켜서 엉망이 되곤 하기 때문이다.              - 79 ~80p

우리는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 수 있음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거나 그 너머의 가능성에 대해 좀처럼 꽉 조인 벨트를 
늦추지 않는다. "이렇게 될 줄 몰랐어"라는 소리를 입에 담는 일조차 나의 예정에 없는 일이라면, 
나중에 모든 것이 뒤집히는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가질 수 없는 것 앞에서 우리는 손목의 힘이나 빼고 살 수는 없다. 그러니까 말이다. 사랑으로 인생을 뒤집을 수 있다는 카드를 알고 있다면 그 카드를 쥐고 사랑에 확률을 걸자.
사랑이라는 유리조각을 기꺼이 밟자. 사랑만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하고, 사랑만이 우리를 더 나은 쪽으로 견인한다.
                         - 110 ~ 111p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지점에 연민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이제 알았습니다.
사랑은 이로운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또 알았습니다
넓은 헌신 없이는 사랑에 닿지 못한다는 것을요.
연민으로 내가 달라지는 것이고, 헌신 없이는 내 달라짐을 이어갈 수 없는..........
역시도 이로운 것과는 상관이 없는 사랑, 이걸 말하려 합니다.
당신 집에는 언제 가야 할까요?
그걸 알려주세요.
시간은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  137p  당신 집에는 언제 갈까요   
 

SNS 프로필 문구가 지적이다 못해 슬픔을 유발한다든지, 특유의 예민함으로 주변을 잘 읽어낼 것 같은 사람이라든지,
말을 붙이면 뚝 하고 주머니 안에서 아주 낯선 것들이 쏟아져나올 것 같다든지......
나는 그런 사람에게 무작정 이끌립니다.
요즘 일이 힘들었는지 이 프로젝트가 잘 끝나면 한번 안아달라는 문자를 보내는 사람의 그것을, 
다정한 주제들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라는 말을 고백하듯 하는 사람에게, 끌리지 않을 수 없고 빨려들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합니다.      
         -  145p  나는 돌려 말하지 않을 겁니다  ---
 

사랑은 '너의 미친 짓으로 내가 얼마나 최고인지를 보여봐'의 상태를 그린 건축 도면으로부터 출발한 집이다.
그것의 정도가 나에게만 보인다거나 또 나만 최고의 상태를 알아서는 안된다.
사랑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내 모습에 혼자 반해서 나 혼자 결승 지점에 도착하려는 듯 날뛰는 일은 아닌거다.
나의 미친 짓과 미친 상태를 다 보인 상대라 하더라도 안 되는 것은 안 되고 마는 것.
사랑에 펄펄 달려들지만 달려드는 것으로다는 아닌 것, 굳이 아닌 이유를 대자면 공기의 과잉인 것.
 
후회를 할 것 같아서 하지 않은 일들 앞에서 후회한 적이 많아서,
후회하지 않는 유전자를 배양시킴. 그후 배양에 성공하였고 후회하지 않음.
절대 후회하지 않음. 이 얘길 왜 하냐면, 후회할 줄 아는 사람이 사랑도 잘한다는 생각.
      -  152p  같이 할 수 없고 .... 나눌 수도 없는 

당신을 처음 만나고.
마침 나에게도 어느 날부턴가 몸속에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앉은 느낌. 아니, 나비보다는 크고 날갯짓도 더 커서 
새라고밖에는 부를 수 없는 감정이 심장 한가운데 앉아 있습니다.
먹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따로 새장을 만들어주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얼마간을 퍼드덕거리고, 노래하고, 심장을
쪼아대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뭐라 부를까요. 이 새 한 마리를 료.
하지만 이 존재 덕분에 힘이 납니다. 이 존재에 맥없이 기대게도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일입니다.
인연을 끌어들이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일.
..................
그래도 된다면 다 사랑하리라.
그런 후에 그래도 된다면 다 잊으리라.         - 156 p

행복하려고 사랑을 하는 걸까? 사랑을 하면 행복해지는 걸까?  설고 투의 질문은 '파도는 밀려오는 것인가, 돌아가는 것인가'하고 따지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랑과 행복은 한몸이어서 그것을 생선 바르듯 뼈와 살로 발라낼 수는 없다.
다만 사랑이 무엇이라고 말은 못해도 행복의 다른 말은 '충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   172- 173p

'나는 풀과 봄의 생명이 끝이 없음을 믿습니다'

사랑이란 건, 안 이어질 것 같은 점들이 선으로 연결되어버리는 과정일 겁니다.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 그림. 그 그림이 걸린 어느 건물 로비에서 누군가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를 만나자마자 그 그림을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싶었다면서 절대로 그러면 안 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캔버스에 손가락 하나를 올렸습니다. 아주 살짝 물방울 그림을 만지고 난 소감은 진짜로 물발울을 만지느 기분이 들었다는 겁니다.
살면서 하고 싶었던 것을, 하나씩 지워나가면서 사는 재미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 옆에서, 단정하게 살려고 하는 나 같은 사람은 다시 태어난다 해도 절대 가져볼 수 없는 그 너머의 쾌감을 봤습니다.
내 눈에 커다래진 건 자신의 울타리를 자주 뛰어넘는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의 회오리가 일어서였습니다.
    -  185p 불꽃이 몸에 박히는 작은 통증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의지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겠다고 사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주변의 그런 사람들이 친구가 된다.
큰 숟가락으로 먹어야 맛있는 음식과 작은 숟가락으로 먹어야 맛있는 음식은 분명히 다르게 존재한다.
섬세하지 않은 사람과는 이야기하기 거북하다. 섬세하지 않은 사람은 나를 스캔하는 방식도 밉고, 알량한 
내 섬세함이 그 사람이라는 벽에 부딪혀 튕겨지는 것도 맵다. '소모'라는 말로도 적합하지 않을 것 같은, 
기운 빠지는 기분마으로도 내 자신이 훼손되는 일은 겪을 만큼 겪었다. 싫다고 하기도 싫다.
그건 내 섬세함 때문일 것이고, 나는 그것을 불치병으로 가졌다. 그것은 음식점에서도 카페에서도, 하물며
주민센터의 직원한테서도 당한다.      -  262p

한 사내의 차례가 되자 제일 사랑했던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랬습니다.
혼자인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어느 날 아침 전혀 기대치도 못한 인사처럼 당황스러웠습니다.
그의 대답은 아마도 자기 자신을 사랑해보지 못한 사람들을 흔들었을 겁니다.
이타적인 사랑도 했을 것입니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다고 했으니까요. 나는 '태어나 지금껏 가장 사랑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었다'는 그 말에 숙연해졌습니다.
뇌 속의 공기들이 촘촘히 재배열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어떤 나지막한
목소리가 종을 치듯 들려왔을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모두는 아직 자기 자신을 사랑해본 적이 없는 건가요?"하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미워하거나 학대하는 방식으로도 자기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는,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사랑의 형태일 거라는 이유로 우리는 스스로를 사랑합니다.
                     -  268p  매일 정각 자신에게 꼭 한 번씩은 들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