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 도서관에서

눈부신 안부 - 백수린 장편소설 -

아라모 2023. 8. 11. 22:05

 

해나는 한국의 기억을 잃어버린 것처럼 독일어로만 말했고, 나는 도시를 조금씩 좋아하게 되었으며,
그곳이 내 자리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리 가족도 행복에 거의 가까워져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언니가 떠오르면 죄책감이 느껴질 만큼의 
행복이었다. 죄책감이 가슴을 쿡쿡 찌를 때마다 속으로 언니에게 말을 걸어야 했을 만큼의 행복.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 109p
 
이모가 돌아가도 이모를 생각하며 혼자 동네를 걸어야겠다고 말하자 이모는
"그래, 삶을 단순하게 만들고 몸을 조금이라도 쓰면 인생이 살 만해져"라고 말했다.   - 214p
 
"해미야,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상대를 바라보잖아?  그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하지만 가끔 그 사람이 나 때문에 느낀 모멸감을 되갚아주기 위해 인적이 드문 새벽 일부러 찾아와
똥을 누고 간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그 똥을 떠올리면 그런 생각이 들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토록 모멸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되었던 게 아닌가하는."     - 249p
 
"그때 나는 네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아주는 게 참 좋았어.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고, 네가 나를 배려하느라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느 걸 알았거든. 근데 해미야, 요즘엔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때 우리에겐 용기가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그래서 우리의 관계도 십여 년 전에 그렇게 흐지부지 끝난 건 
아니었을까."
.........
피한 것이다. 달아난 것이다. 나에게 다가와 마음의 문고리를 잡고 흔드는 우재로부터.
그래 내가 원했던 건 누군가의 삶에 내가 또 다시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그 무시무시한 가능성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뿐
이었으니까.    - 262~263p
 
그런데 오늘 아침에 침대에 누운 채 추크슈피체의 별이 쏟아지던 풍경을 떠올리는데 갑자기 네가 과학 시간에 배웠다며
오래전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나더라. 개개의 인간들의 몸을 구성하는 아주, 아주 작은 요소인 원자는 멀고도 먼 
옛날 폭발한 어느 별에서 왔다는 말. 기억나니? 이런 기억들은 대체 어디에 있다 튀어나오는 걸까? 
지난 수십 년 동안 새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아무튼 오늘 아침엔 그 말을 곱씹어보다가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단다.
우리는 모두 그 자체만으로도 태초의 별만큼이나 아름다운 존재들일지도 모른다는 깨달음 말이야.
                    - 302~30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