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현재 서울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좁은 골목과 비탈, 볕 좋은 날 지붕 위에서 빨래나 우거지를 말리는
집들이 있는 풍경을 유년의 장소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는 도시의 편리함과 쾌적함을 온몸으로 누리며 사는 그런 사람들 중 어떤 이들,
도시의 지나친 매끈함이 자신을 실향민으로 만든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옛 골목과 낡은 집으로
이루어진 우리 동네는 꽤 좋은 구경거리인 모양이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사람들이 우리 동네로 놀러 와 골목 여기저기에서 사진을 찍는 것을 보면 말이다.
- 15p 1부 <나의 작고 환한 방 > 장소의 기억, 기억의 장소 중에서 -
"사는 건 자기 집을 찾는 여정 같아."
언니가 그렇게 말한 건 케이크를 먹던 중이었다.
"타인의 말이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나 자신과 평화롭게 있을 수 있는 상태를
찾아가는 여정말이야."
그 말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미술을 전공한 후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 수녀가 되겠다고 갔다가
10년 만에 다시 한국에 돌아와 육체노동을 하며 살고 있는 언니도, 글을 쓰고 읽으며 나누는 게 삶의
대부분인 나도, 방식은 다르지만 같은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걷는 여행자들처럼 느껴졌다.
- 40p 여름 식탁 단상 중 -
그러던 어느 날, 모든 식물들이 다 죽어버려 황폐해진 풍경을 목격하게 될 거란 각오를 하고 옥상에
올라갔을 때 나는 화분마다 가득한 초록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연두빛 강아지풀과 새하얀 달맞이 꽃 , 화분의 흙을 뒤덮은, 크기와 모양이 다른 그 초록 잎들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내가 방치해둔 사이 나 몰래 내 화분에 씨앗을 심은 것은 바람이었을 것이다.
바람은 밤의 요정처럼, 성스러운 밤 선물을 머리맡에 놓아주고 간다는 먼 곳의 노인처럼 한 밤중에
찾아와 씨앗을 흩뿌려놓았을 것이다.
- 44p 마당없는 집 중 -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강아지와 동거하는 삶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강아지를 키우면서 깨닫게 된 사실은
생명을 가진 존재는 모두 다 개별적이고 고유하다는 것이다.
봉봉과 함께 살기전, 내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들은 그저 '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봉봉을 만난 이후 나는 모든 개들이 성격도, 표정도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
무엇이 되었든 생명을 가진 존재는 한없는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무한한 사람을 받으며 성장한 존재는
사랑을 줄 줄 안다. 봉봉은 차갑고 이기적이기만 하다고 생각한 내 안에도 사랑이 이렇게나 많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려준 존재다.
봉봉이 먹고 싶어 어쩔 줄 몰라하는 데 목숨을 잃을까봐 먹지 못하게 막거나 고통스러워 하는데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해야만 할 때, 자유의지를 주었다면서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게 만들고 누구보다 사랑한다면서
때때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시련을 주는 신의 뜻을 나는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강아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볼 때면, 나는 이 넓은 우주에서 우리가 만나 이렇게 서로에게 특별해질 수 있게
만든 힘이 무엇일지 궁금해지곤 했다. 우리의 존재가 서로에게 깃들고, 이렇게 서로를 비춰주는 조그만 빛이
될 수 있게 해준 그 힘이.
말도 통하지 않고 종마저 다른 둘 사이에 사랑의 시간이 쌓여 서로가 서로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존재로 거둡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기적이 아닐까?
- 99p .102p. 104p 2부 <산책하는 기분> 사랑의 날들 중 -
내가 아는 건 아름다움은 획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똑같은 형태의, 똑같은 무늬의 아름다움은 얼마나 뻔하고 재미없는지.
새로운 것들은 멋쟁이 친구처럼 세련됐지만, 시간을 버텨낸 것들은 과목한 친구처럼 듬직하다.
나는 편리함이나 쾌적함이주는 선명한 기쁨만큼이나 낡고 오래된 것이 주는 은은한 기쁨을 아낀다.
오래된 것이 아름다운 건 시간을 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사람이나 동식물처럼 생명을 지닌 것이든
공간처럼 그러지 않은 것이든, 무언가가 품위와 존엄을 가질 수 있는 건 수많은 상실과 슬픔을
견디며 쌓아올린 세월의 무게가 있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있다. 시간을 견뎌낸 것들은 그것만으로도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 140p 다시 운동화를 신고 중 -
"안돼, 일요일 오전에는 내가 교회를 가요. 저기, 여의도 순복음교회."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의 성장배경과 우리가 받은 교육, 여러 관계를 겪으면서
굳은살처럼 딱딱해진 편견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날밤, 그녀에게 주기 위한 물건들을 챙기러 부엌으로 방으로 거실로 돌아다니는 동안
"여의도 순복음교회"라는 말은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
- 180p 3부 <멀리, 조금 더 멀리> 타인을 쓴다는 것 중 -
사회가 어떻게 노인을 타자화해왔는가에 대해 깊이 사유한 시몬 드 보봐르는 60대에 접어들어
쓴 노년에 관한 책<노년>에서,
일찍이 우리는 노인을 타자로 여기기 때문에 '노화' 즉 '나 자신'이며 동시에 스스로가 '타자'가
되는 이 낯선 상태를 기꺼이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이 듦이 우리에게 선물해주는 가장 가치 있는 축복은 젊은 시절 우리의 눈을
가리는 허상과 숭배를 치워버리고 우리가 진정성에 가닿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도 적었다.
- 223p 마흔즈음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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