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 도서관에서

작별곁에서 - 신경숙 연작소설 -

아라모 2023. 7. 31. 18:38

 

이 세통의  편지가 당신을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주기를 ..... 신경숙

 

나는 메말라가지만 내가 어떤 글을 쓰든 그 글들이 종내는 작별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어깨를 

보듬어주는 온기를 품고 있기를 바라본다. 그리하여 당신이 사랑하는 것, 마음이 묻어 있는 것들과 

온전하게 작별할 수 있기를. 지금 내게는 작별하는 일이 인생 같다

                     - 작가의 말 -

 

조국과 정부는 다르다로 생각하네. 딱 한번 서울에 다녀온 후에 알게 되었네.

조국이 우리 가족을 버린 게 아니라 정부가 우릴 버린 것이었다는 걸.

남편이 그렇게 그리워한 곳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을 때에도 가지 않은 마음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네.

내 아들들이 제대로 살아보지도못한 조국이지만 마음에 품고 살아가주기를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지.

이 나이가 되면 자식의 침대가  놓여 있는 곳이 조국인지도 모르지.

모국어와 떨어져 살면서 모국어로 시를 쓰는 일은 쉽지 않네. 내가 써놓고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게 있어.

        -   73p  봉인된 시간   중  -

 

너에게 갈 수 없으니 나는 여기 있을게. 오늘은 어땠어?

내일도 물을게.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하지.

반짝이는 눈망울을 한 아이들, 모든 것을 잃고 멀리 떠나는 사람들, 남루한 세간살이들,

누군가를 부르는 애타는 목소리, 이 고통스러운 두려움과 대면할게.

사랑하고도 너를 더 알지 못해서 미안해. 그 강에서 내 눈 속으로 들어왔던 반딧불이 한덩어리가 

너에게 날아가기를 바라.

통증 때문에 점액질이 되어버렸을지라도 너의 눈이 단 일초라도 그 빛의 덩어리와 마주치기를.

신은 늘 굶주려 있는 것 같아, 잡아먹힌다 해도 앞으로 나아갈게. 내일 다시 연락할께.

        -157p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중  -

 

잊을 수 있으면 잊고 지내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닙니다. 잊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시간과 함께 모든 게 희미하게 옅어지는 건 가을 뒤에 겨울이 오는 일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맺힌 게 없이 자연스럽게 잊히는 삶을 누구나 살게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

여기가 싫어서 떠났는데 여기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날들을 보내고 나니....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게 되었다고요.

저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 답장을 쓰지 못한 지난 팔년은 이 나라의 언어가 아닌 다른 나라의 

언어를 단 하나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없는 저 자신을 탓했던 세월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럴 수만 있다면 여기를 떠나 살고 싶었습니다. 다르게 살고 싶은 다른 삶을 꿈꾸어서가 아니라

아는 얼굴이 한 사람도 없는 곳에 가면 저 자신을 먼지처럼 방치해도 될 것 같아서입니다

        -   167.170p 작별 곁에서 중  -

어느 날인가 이 다랑쉬굴 앞의 표석 앞에 서게 되었을 때 바람이 너무 휘몰아쳐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날이었는데 내 숨은 내 것인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 살지 못한 사람들 몫까지 내가 함께 살고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요.

           -  257p

다랑쉬굴 앞에 함께 앉아 있어주던 모르는 남자가 이제 이 벌판을 떠날 모양인지 세워둔 자전거 곁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시디신 눈 속으로 차오릅니다.

이젠 여기 없는 존재들을 사랑하고 기억하다가 곧 저도 광활한 우주 저편으로 사라지겠지요.

바람과  먼지와 들꽃들이 일렁히는 이 황량한 벌판에 버려진 텅 빈 항아리에 선생님께 전해드리고 싶은 

이야기들이 모여드는 게 느겨져 제 얼굴이 붉어집니다. 무엇을 그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날이

오기도 하는군요. 어서 유정씨의 마당으로 돌아가 잠긴 창고의 문을 열어보고 싶어 모르는 남자를 따라

저도 가만 몸을 일으켜봅니다.

          -  260p  작별 곁에서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