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 도서관에서

평일도 인생이니까 - 김신지 에세이 -

아라모 2023. 7. 31. 18:37

 

사내 카페에서 동료와 얘길 하다 퇴근시간에 자꾸 일을 주는 클라이언트 때문에 스트레스라는 말이 나오면
인숙씨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어머야, 니 스트레스를 왜 받나, 그거 안 받을라 하믄 안 받제." 
이 타이밍에 웃음을 터뜨렸다가는 도무지 수습 불가겠다 싶을 정도로
자꾸만 등장하는 윤 여사, 램프의 요정.
그러니 이 모든 건 결국 마음의 문제다.
스트레스가 전화를 걸어오면 나는 그냥 안 받을란다.
       - 19p  어느날 스트레스가 전화를 걸어오면 중~
 
인생에 무언가 더 중요한 것이 있고, 지금 내 삶이 미진한 거라고 여기고 싶지 않다.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그게 진정한 나라고 여기고 싶지도 않다. 
보이지도 않는 하나의 빅피쳐보다 매일 눈앞에 보이는 스몰 픽쳐 100개, 1000개 
그리고 살고 싶다. 오늘은 큰 그림의 일부가 아니라, 그냥 오늘이니까.
       - 25p p 그놈의 빅 픽쳐, 나란 놈은 스몰 픽쳐 중 -
 
요즘의 강은, 일은 할 만하냐는 물음에 그냥 나쁘지 않다고 대답한다.
처음보다는 낫다고. 그 정도면 됐다고. 나는 항상 그의 그런 점을 높이 샀다.
그 정도면 되는 것, 대단히 만족스럽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기는 것.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지 못한다 해서 좌절하지 않는 것. 나는, 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건 때로 간절함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 41p  좋아하는 일을 하면 행복해질까 중 -
 
어른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는, 어린 우리가 그토록 바랐던 것을 
스스로에게 주려고 어른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과자를 사 먹지 못했던 아이는 나에게 과자를 사주는 어른으로 자라고
(강은 동네 마트에서 세일하는 '빵빠레' 열개를 산 날, 어른이 된 게 실감난다고 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못했던 아이는 원하는 장난감을 나에게 다 사 줄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고,
좁은 시골마을에서 살았던 아이는 낯선 나라를 여행하는 어른으로 자란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의 결핍을 채워 주는 사람으로 자라,
내 행복은 내가 책임지는 법을 익히게 된다.
어른으로 사는 기쁨은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 66.67p  어른이 되어 좋은 게 있다면 중 -
 
황금 같은 토요일 오후의 두 시간을 길바닥에 버리고 있는 내 자아는 작아지고
작아져서 조수석에 앞 글로브 박스에라도 욱여넣을 수 있는 크기가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던 강이 말했다
"괜찮아, 가는 길인데 뭐. 이것도 여행의 일부라면 일부지."
강은 가끔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한다. 수시로 기우뚱거리는 나를 대신해 시소 위에서
그때그때 앞으로 두 칸, 뒤로 한 칸씩 옮기며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말을. 듣고 나면
늘 이 상황이 별거 아닌 것처럼 여기게 하는 말을.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서울을 출발해 막히는 도로 위에서 보낸 시간이 세 시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  95p 평일도 인생이니까 중 -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 나의 콤플렉스로 남들을 괴롭히지 않을테니까.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핑계도 대지 않고 불만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한수희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중에서-
나는 이 문장이야말로 어른의 태도하고 생각한다. 어른은 그저, 내 인생을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인생으로 만들며 살면 된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집에 살면서, 나를 나답게 만드는 친구들을 곁에 두고,
나를 나답게 만드는 일을 하면서.
화려해지려고,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기를 쓰는 대신 평범한 일상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찾으면 된다.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은 아직 안 온.....게 아니라 안 온다. 
당연하다. 그런 건 없으니까. ---
      - 101.102p  Today is better than tomorrow 중 -
 
지나는 주변으로 향기를 남기듯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반경을 만드는 사람.
어디에 도착하더라도 자신을 놓치지 않고 사는 사람. 그런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네 개의 다리가 흔들림 없이 균형을 이루는 의자처럼. 어떤 울퉁불퉁한
삶의 표면 위에서도 결국 안정감 있게 서고 마는 그런 의자처럼.
       -  108p  어디든 내 방이라고 생각하면 중   -
 
"같은 일을 두 번 할 수도 있단다. 그게 아주 특별한 일이라면 말이다'"
이 대화는 워낙 좋아해서 몇 번이나 인용한 적이 있다. 그건 그만큼 지금 나의 삶이 
이  문장 위에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좋았던 장소에 두 번 가는 일, 쉬운 듯 보여도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여행에서라면 더더욱.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 같은 장소에 두 번 가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한다.
요즘 내가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다.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 이미 읽은 책을 한 번 더 읽는 시간. 여러 곳에 가는 것보다 한 장소에
제대로 머무르는 일.
거기 좋았잖아, 또 가보자,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좋다.
        -  159p  두 번 해도 좋을 것들  중 -
 
나는 왜 바쁜 가. 쓸데없는 책임감 때문일까.
나도 안다. 한 호흡만 쉬고, 한 걸음만 떨어져서 바라보면 세상에 그 정도로 바쁠 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는 것쯤. 그렇지만 '아는' 것과 '사는'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다
................
퇴근하고 돌아오면 혼자 테라스로 나가서 평소 좋아하는 향을 하나 피워 놓고 그 향이 다 타기까지 
앉아 있는 시간을 보낸다. 2,30분 정도 될까. 처음엔 가만 앉아 있기가 좀이 쑤시기도 했는데 이젠 편하다.
기억해 두고 싶은 장면을 날마다 하나씩 발견하기도 한다.
할아버지의 느린 걸음을 기다려 주는 늙은 개, 머리 위에 단풍잎 한 장이 떨어진  줄 모르고 씩씩하게 걷는
아주머니... '힐링'이란 단어의 생김새가 만져지는 느낌이 든다.
나는 쉬고 있구나. 나는 회복되고 있구나. 나는 충전되고 있구나 , 하고 .
       -  167p / 172p  바빠서 나빠지는 사람 중 -
 
예전엔 '마음이 있으면 되지 '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마음을 옮겨 놓은 행동이 훨씬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 돈주고 식물을 사서 집 안에 들였으니 내겐 당연히 식물을 아끼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이었다. 아끼는 마음도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그다지 소용이 없었다. 
표현하지 않은 마음은 사실 세상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마음이란건
궁색한 변명과 자기 합리화가 필요할 때 꺼내 드는, '나만 알고 있던' 마음에 그칠 때가 더 많으므로.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정말 그랬다.
        - 233p 마음만으론 안 되는 일 중  -
 
'생애 주기'라는 게 정해져 있다고 믿는 세상에서 남들과 보조를 맞추느라, 사람들이 자기 나이를 사는 데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들과 다른 속도는 결코 '뒤쳐지는' 일이 아니니까.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을 좀 늦게 갈 수도(안 갈수도) 
있는 거고, 이런저런 경험을 하느라 혹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어 가느라 졸업이 늦어질 수도 있는거다.
'그 좋은 나이에' 세상이 해야한다고 말하는 일들 다 밀어둔 채로, 자아도 찾지 않고, 어학 공부도 하지 않고, 
여행도 하지 않고, 경험 같은 거 쌓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시간을 보낼 수도 있는 거다. 그건 결코 버리는 시간이 아니다.
낭비도 아니다.그냥 내가 내 마음의 흐름에 따라 내 시간을 사는 일일 뿐이다.
            - 243p 각자의 인생, 각자의 속도 중  -
 
그걸 보니 아흔이 넘은 우리 할머니에겐 지금의 내가 얼마나 좋을 때로 보일까, 엄마 눈에는 또... 
아니, 하물며 내년의 내가 보면 올해의 나는 얼마나 좋을 때를 보내는 걸로 보일까 싶어졌다.
그러니 이 모든 건 그저 우리 눈에 언제부턴가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리라.
지금 이 순간도 조금만 지나 돌아보면 ' 좋은 때'가 되겠지.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순간들은
그렇게 된다. 우리는 모든 나이를 한 번씩밖에 살 수 없으므로. 스물 살이 한 번뿐이고, 서른 사이 한 번뿐이고, 
마흔 살이 한 번뿐인 것처럼.
          -  261p 좋은 때다, 라는 말의 진짜 의미는  중 -
 
한 달 남짓 혼자서만 지내기는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아침저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나는 그 누구도 아닌, 나라는 사람과 함께 
여행 중이라는 것을. 그건 외롭고 적막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속에 무언가가 조용히 차 오르는 것을 
느끼는 일이기도 했다. 창너머 달처럼, 내 안의 비어 있던 어떤 부분이 차오르는 것을.
.........................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빈 집에 앉아 보낸 그 시간이 나의 어느 부분을 키웠으리라고.
개미들이 줄을 지어 조그만 과자 부스러기를 나르는 모습을, 매미가 벗어 놓은 허물이 햇살에 빛나는 것을,
붓꽃의 꽃잎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잠자코 들여다보던 시간이 있었던 덕분에 나는 무언가를 '그냥' 보는 사람이 
아니라 '골똘히' 보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외로움이 우리를 자라게 하는 시간이 분명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265.266p 잘 외로워지는 연습 중  -
 
아무런 계기도 전조도 없이 강은 눈물이 부쩍 늘었다. 남성 호르몬이 줄어들어서라고 본인은 한탄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건 화면 속의 슬픔이 무슨 슬픔인지 알아보는 사람이 된 것이다.
어떤 슬픔은 어떤 건지 알겠어서 슬프고, 어떤 슬픔엔 내 부모가 겹쳐서 슬프고, 어떤 슬픔은 겪어 보지 않은 내가 
그 마음 안다고 도저히 말할 수가 없어 슬프다.
그리하여 우리는 내 슬픔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슬픔을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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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눈물을 아는 놈이 되어 반갑다 하면 강은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려나.  하지만 그건 분명 반가운 일이다.
슬퍼할 수 있는 일이 많아져서. 우리가 좀 더 사람다워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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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 사람은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한다. 그 장면은 때로 자연이었다가 때로는 
사람이 되었다가 한다
              -  275.276 p 4월을 보내는 일기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