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그 약을 '불멸의 연인'이라고 불렀다. 즉, 연애 초기에 두 사람이 '불멸의 연인'을 먹으면 그 순간의 강렬하고
달콤한 흥분 상태가 몇년이고 몇십년이고 유지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사귄지 한달, 혹은 100일이 되었을 때 사랑을 고백하면서 함께 병원에 가서 처방전을 받는 게
신풍습이 되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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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약을 끊었는데 사랑이 사라진다면 지금 우리 감정은 가짜라는 얘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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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느끼는 감정의 기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그렇게 중요해? 중요한 건 감정 그 자체 아닐까?
내가 화장을 해서 예쁘게 꾸몄을 때, 내가 예뻐 보이는 이유가 화장 때문인 걸 알게 되면 자기는 실망할 거야?
나더러 화장을 지우라고 할 거야?"
그녀는 한번은 그렇게 되물었다. " 사랑은 감정만큼이나 의지의 문제이기도 한 거야. 거꾸로 생각해봐. 내가 만약
'나를 사랑한다면 계속 그 약을 먹어'라고 말한다면, 자기는 망설임없이 약을 먹을 거잖아. 그러면 이런 고민도 안 할
테고." 그녀는 그렇게 따지기도 했다.
- 정시에 복용하십시오 중
'종종 타인은 지옥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그 지옥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곳에 있음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 그 옳고 그름은 누가 정해? 하느님? 모든 윤리의 기초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인간적 공감에서 오는 거 아닐까?
자기 교회 다녀?"
타인의 고통과 공감을 가장 앞세우는 태도가 보편윤리의 어떤 측면과 충돌한다고 막연히 느끼고 있었으나, 그런 생각을
정연하게 풀기 어려웠다. 행위자의 의도나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수성에 따라 어떤 행동의 옳고 그름이 달라지는 걸까?
상대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미신적인 믿음으로 해를 끼치는 행위가 옳을 수 있는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에게 나쁜 일을 저지른 것과 무덤덤한 사람에게 같은 짓읅 저지른 걸 구별해야 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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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삼 인간의 공감 능력에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얼굴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조차, 뒷모습만으로도 상대의
기분을 알아차린다. - 알래스카의 아이히만 중
"미래의 어느 지점에서 일어날 일을 알게 된다는 것과 전체 미래를 본다는 것은 전혀 다르거든. 그런데 난 그 차이를 몰랐었어. 그 차이를 모르는 채, 모든 건 미리 결정돼 있고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 빠졌어. 그래서 열의 없이 사는 데 익숙해졌어"
내게는 천리안이 있었다. 한달에 한 두번 정도,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텅 빈 것 같은 때 어둠 속에서 불쑥 영상을 보곤 했다.
-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 중
'인간은 싸고, 무게도 70킬로그램밖에 나가지 않는 비선형 다목적 컴퓨터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을 더 싸게 만드는 방법은 없을까?
탄산음료 회사의 아이디어는 인간의 무게를 70킬로그램에서 획기적으로 줄이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몸에서 '컴퓨터'인 부분만 금성으로 보내기로 했다.
다시 말해, 목을 잘라 머리만 우주선에 싣고, 목 아래 몸뚱이는 지구의 시설에 냉동보관하자는 것이었다.
안 될 게 뭐가 있겠는가? 이렇게 하면 단지 우주인 한 사람당 60킬로그램 남짓만 절감하게 되는 게 아니었다.
그 사람을 생존 시키는 데 필요한 물과 음식의 양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상대에게 우호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유진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과 자아정체감을 잃게 될 가능성이었다. 다른 사람이 답을 알려준 정답과 자신이 선택한
오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후자다. 사람이 오답을 선택하면서 그 자신이라는 한 인간을 쌓아가는 것이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약'을 먹고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되더라도, 누군가가 그 약을 마실물에 몰래 타 넣어 먹게 되는 것과 스스로 복용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 당신은 뜨거운 별에 중
"설문에 참여하는 사람의 답은 늘 왜곡되어 있습니다."
센서스 코무니스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돈을 받지 않아도 말이죠. 사람은 기본적으로 속내를 드러내길 꺼리고, 창피한 마음에 거짓 대답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스스로를 속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늘 여론조사에서 오차가 발생합니다. 하지만 뇌파를 속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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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파를 이용한 여론조사는 두 가지 큰 장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엄청나게 많은 것을 물어볼 수 있다는 겁니다. 무언가를 보거나 들으면 사람은 3백 밀리초 뒤에야 비로소 언어화된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결론은 이미 그 3백 밀리초 사이에 나 있습니다. 뒤따르는 생각은 이미 내린 결정을 합리화하는 데 쓰이는 겁니다. 제시된 단어에 응답자가 호감을 느끼는 지 불쾌감을 느낀느지를 분석하는 데 1초면 충분합니다.
- 센서스 코무니스 중
"인간을 사랑하게 됐다는 말을 내가 한다면, 창조신들은 그건 사랑이 아니라 깊은 병이라고 대꾸할 거야."
내가 사는 세계는 그저 신들의 놀이터일 뿐이라고 그녀는 내가 설명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에서 벌일 수 없는 전쟁을 즐기고 싶어 우리 세계를 창조했다고. 이곳에서 나를 비롯한 인간들의 역할은 그들의 드라마를 더 박진감 넘치게 만드는 것이라고. 병사와 백성이 되어서.
슬픔과 비명은 예측할 수 없어야 더 흥미진진하기에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다고.
- 여신을 사랑한다는 것
"나는 알고리즘에 굴복하지 않겠어. 나는 변하겠어. 인간은 변화할 수 있는 존재야. 나를 도와줘.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게해줘."
그러면 상대가 누군지도 제대로 모르는 채 로 사귀었단 말인가요?
인턴이 물었을 때 이유진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어차피 오래 사귀어도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예요.
끝까지 그렇답니다, 라고 말하고 싶기도 했다
상대가 누군지 몰라야 사귈 수 있지 않나요, 하고 되묻고 싶기도 했다.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미래가 어떨지 몰라야 사랑하고 모험하고 발견하고 결단할 수 있다.
- 데이터 시대의 사랑
* 서간체 소설이 인도주의 혁명을 이끌었다면, 소설보다 더 깊이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거기에 공감하게 만드는 기계가 나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누가 그런 기곌르 만들고 싶어 할까? 타인을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악인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상상을 하다가 이 작품을 쓰게 되었습니다.
- 작가의 말 <알래스카의 아이히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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