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를 쓰며 엽편소설을 쓰는 즐거움을 한껏 느꼈던 기억이 있다.
받침이없는 이름을 찾다가 아라라는 이름을 골랐는데,
어쩐지 마음에 들어서 이후 여러번 쓰게 되었다.
가까운 사람 중에 같은 이름이 없어서 더 편히 쓰는 이름인것 같다.
가장 과감한 주인공에게 자주 붙이는 이름이다 - 15p
변덕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현실 세계의 연애가 참혹할 때 그것에 대한 환상을 써도 되는 가 하는 고민에
깊이 빠진 상태였다.
세상이 드물게 나쁜 사람들과 평이하게 좋은 사람들로 차 있다고 믿던 시절엔 마음껏 사랑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
달콤하고 달콤해서 독할 정도인 소설을. 아라는 사랑을 믿었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완벽히 이해하는 관계를. 모두가 무심히 지나친 특별함을 서로 알아봐주는 순간을.
연애소설을 사랑했고 연애소설을 읽고쓰는 사람들을 사랑했다.
- 아라의 소설1 29p
어쨌든 잘하는 걸 하자, 아라는 키보드에 손가락을 가볍게 올려놓았다.
아라가 잘하는 것은 목 넘김이 좋게 당의정 입히기. 그리고 폭력의 희미한 기운을 감지하기.
그렇다면 일단은 연애소설처럼 보이는 스릴러 소설을 쓰면 어떨까? 태연한 얼굴을 한 폭력의 기미를
이르게 잘 발견해서 안전하고 자유로워지는 주인공에 대해 써야겠다고 말이다.
사랑처럼 보이지만 사랑이 아닌 것에 대해서 치밀하게. 사랑 이야기인 듯 사랑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 34p
읽기 쉬운 소설이 얼마나 어렵게 쓰이는지 쉽게 쓸 수 있는 사람만 안다고 믿어왔다.
장르소설을 두고 한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 37p
"그렇게 늘 애매하게 웃는 얼굴로 있지만, 오빠는 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 적이 없어. 그래서 그 편안한
얼굴이 이젠 무관심의 증거로 보여."
- 즐거운 수컷의 즐거운 미술관 중 78p
어떤 작품이 제일 마음에 드느냐고 물어 왔으면 진심을 담아 여자친구의 작품을 골랐을 텐데, 질문이 틀렸다고
우기기엔 늦어버렸다.
"한동안 연락하지 말자. 아티스트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들어가. 외국에 갈거야. 거미 다리 아래 웅크리고 울겠지........"
헤어지는 순간에도 여자친그가 하는 말은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다.
서로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사랑에 선행되어야 한다면, 헤여지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체념이 들었고
더는 잡지 못했다. - 81p
어느날, 그 애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무당벌레 한 마리가 날아올랐고, 나는 그 애를 사랑한다고 느꼈다.
가서 그 순간에 대해 이야기해줘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월계수로 가득한 방에서. 브론즈 폐가 빛나는 방에서.
비록 우리가 쓰는 언어가 다르다 하더라도,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나 제대로 봐왔다고, 언제까지나 제대로 봐줄 거라고. - 104p
[호오 好惡]
도트 무늬의 도트는 작고
사이는 멀며
일렬이 아니어야 해요
점들이 좀 일렁이며 흩어지면 좋겠어요
당신이 모든 것을 대수롭지 않아 해서 좋아해요
지루해하고 시시해하는 표정이 좋아요
감동 같은 걸 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전집을 버리고 잡지를 모으는 사람이라서
.....................................
우리 괜찮게 살다가 좋은 부고가 되자,
그렇게 말하곤 웃었지요
당신이 견디면서 삼키는 것들을
내가 대신 헤아리다 버릴 수 있다면,
유독하고도 흡족할 거예요
"저는 사실 불안해서 말의 여백을 못 견디는 거예요.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고 어색한 시간이 이어지면 초조해하고 못 견디는 이상한 강박이 있어요. 그래서 집에 가면 늘 후회해요. 말을 너무 많이 했다, 혹 웃기려다가 무신경하진 않았나, 다른 사람이 말 할 차례를 빼앗진 않았나."
"언니는 진짜 중요한 말만 적절하게 하잖아요. 물론 그게 면접에서 유리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몇 겹의 필터를 우아하게
빠져나오는 말들 쪽이 좋아요. 전 전혀 못하겠지만." - 스위치 중 143p
채집선은 이제 지구 궤도를 떠나,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오랜만에 편안한 복장이 된 수석 채집가는 네 개의 손과 쉰두개의 손가락을 길게 늘여 스트래칭했다.
보조 채집가도 여덟개의 다리를 옥죄고 있던 버클들을 느슨하게 풀었다.
"고작 두 다리로 걸었다니, 얼마나 척추에 안 좋았겠어요?"
"더 일찍 망하지 않은 게 놀랍네요."
- 채집기간 중 160p
사진 잡지 <보스토크>의 SF 특집이었다. 함께 실린 최다함 작가의 도시 사진을 미리 감상한 후 썼다.
특히 거대한 전신주와 비어 있는 교각 사진이 인상적이어서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인간의 눈썹이 얼마나 이상한지에 대해 늘 쓰고 싶었기 때문에 쓴 이야기이게도 하다.
평소에 눈썹에 대해 무척 이질감을 느끼곤 했다. 눈썹의 기능만 생각한다면 그냥 눈 위까지 이마가 전부 털인게 훨씬
효율적이지 않나? 동물은 보통 눈썹이 없고 다 털인데 인간은 기이하게도 이마를 굳이 비우는 쪽으로 진화했다.
왜 <모나리자>가 눈썹이 없는지 알 것 같다. - 162p
아라도, 아라의 친구들도 작은 집에 살고 있어서 물건을 살 때는 오래 망설이고 경험을 살 때는 상대적으로
망설이지 않는다. 운동을 배우고, 강의를 등록하고, 여행을 간다.
원데이 쿠킹 클래스를 듣지만 집에 오븐을 설치하진 않거나, 전자책을 읽고 유료 독서 모임에 나가긴 해도
종이책은 신중히 사는 식이다.
- 아라의 우산 182p
조세핀 테이의 <브랫 패러의 비밀>도 읽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추리소설이었다. 감각적이었다. 주인공들이 말을 타면 마른풀 냄새가 나고,
음식을 먹으면 맛이 느껴지고, 절벽에 햇빛이 어리면 눈이 부셨다.
현정은 감탄했다. 언니, 왜 그렇게 일찍 죽었어요? 한 열권만 더 쓰고 죽지. 아쉬워하면 책장을 닫았다.
- 20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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