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을 쓴다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실로 진귀한 경험이다.
단편소설과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의 세계와 다양한 인물들을 창조하고 그 안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다. 자신만의 테마파크를 만들고 그 안에서 논다는 점에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윌리 윙카 같은 인물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장편소설을 일단 시작하고 나면, 그리고 그 세계가 자신의 질서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안에서 빠져나와 일상을 마주하기가 점점 싫어진다.
일상은 어지럽고 난감하고 구질구질한 반면 소설 속의 세계는 언어라는 질료로 견고하면서도
흥미롭게 축조되어 있다. 무엇보다 내 소설은 나를 환영하고 있다. -27p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물질이 아니라 한 덩어리의 순수한 힘으로 보았다.
힘이 커지면 어른이 되고 힘이 완전히 사라지면 다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간다. 죽는 것이다.
힘은 좋은 공기와 물, 자연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강해지고 반대의 경우 약해진다.
권력자는 사람들로부터 힘을 많이 받는 사람이고 또 그 힘을 잘 나누어 주는 사람이다.
그들에게 훌륭한 인간이란 많은 것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 많은 것이 잘 지나가도록 자신을 열어두는 사람이다.
하나의 사상이 나라는 필터를 거쳐 한 권의 책이 되고 한 곡의 음악이 나라는 필터를 거쳐 아름다운 문장이 된다.
이럴 때 나의 힘은 더욱 순수하고 강해진다. 모든 것이 막힌 것 없이 흘러가며 그 과정에서 본래의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을 생성하게 될 때, 인간은 성숙하고 더욱 위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 36p
서울로 몰려드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한강변의 모래밭을 다져 만든 잠실의 아파트단지는 내가 살던 작은 마을들과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피난민 캠프나 병영에서처럼 그곳의 주민들은 단지와 동 호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분류되었다.
어쩌면 그곳에 사는 모두가 나처럼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느끼고 필사적으로 서울생활, 아파트생활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남들 사정을 헤아릴 처지가 아니었다. - 90p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오직 한가지 이유 때문에 아그리젠토에 온다. 바로 '신전의 계곡'을 보러 오는 것이다.
신전의 계곡에는 이 도시가 그리스문명의 일원이던 시절에 건설된 거대한 신전들이 남아 있다.
시칠리아의 여행안내서 대부분은 이 신전의 계곡 사진을 표지로 하고 있다.
특히 거의 온전하게 보존돼 있는 콘코르디아신전을 이렇게, 또는 저렇게 찍어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2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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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신전들은 이제 무너져 기둥 몇개만 남아 있다. 호텔의 발코니에 앉아 그중 가장 온전하게 남아 있는
콘코르디아신전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저런 유적들은 왜 우리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는가? 왜 우리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는가?
왜 우리는 저런 반쯤 무너져버린 불완전한 건물들에서마저 미적 쾌감을 얻는 것일까?
왜 유네스코와 이탈리아 정부는 엄청난 세금을 들여 이 유적들을 복원 혹은 보존하려는걸까?
그리고 왜 아무도 그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 것일까? 왜 우리는 어떤 건물들은 거금을 들여서라도 보존하고,
거듭하여 그것을 감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 반면, 다른 어떤 건물은 무가치하다고 여겨 당장 무너뜨려 한 줌의
먼지로 만들어버리는 게 마땅하다고 믿는 것일까?
아그리젠토의 신전들은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들을 불러일으킨다. -282p
신전이라는 말에는 태생적으로 아이러니가 있다.
신전은 신이 사는 집이지만 실은 인간이 지은 것이다.
신전은 인간 스스로 상상해낸, 크고 위대한 어떤 존재를 위해
지은 집이다.
그러나 인간이 지어올렸기에 이 집들은
끝내 돌무더가로 변해버린다.
폐허가 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전이라는
건축물의 운명이다.
그렇게 무너진 신전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중으로 쓸쓸한 일이다.
제우스나 헤라,포세이돈 같은 신들이
상상 속의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
인간이 세운 높고 위태로운 것은 마침내 쓰러진다는 것을
알게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문명이 사라지면 그 문명이
상상했던 것들까지도 함께 소멸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곳에 살았던
일군의 인간들이
자신을 닮은 어떤 존재들을 한때 진지하게 믿었다는 것이다.
현대의 우리가 하늘을 날아디니는 슈퍼히어로에 열광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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