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 도서관에서

굿바이 R (전경린소설)

아라모 2023. 3. 23. 15:38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대개 무언가에 싫증나거나 지루하거나 권태로워서이다.

싫증은 피로에서 생기고 지루함은 반복에서 생기고 권태는 억류에서 생겨난다.

이것은 삶의 주된 상태이고 셋 다 불감증의 양상을 드러낸다. 그리고 싫증은 중단을 바라고

지루함은 일탈을 바라고 권태는 전복을 바란다.

그러나 일상은, 중단되지 않고 일탈도 없고 전복도 없이 드라마와 패키지 여행과 기념일에 의지해

간신히 흘러간다

               12p  승객 중~~

 

한번은 사색에서 만난 정신과 의사로부터 가장 신속하게 끝난다는 정보를 듣고, 유통이 금지된 맹독성 

복어알을 구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의사는 복어알을 냉동실에 보관하고 살면 좀 안심이 된다고 했다. 윤재는 안심이 된다는 말에 동감했다.

'한번 더 '가 안 되는 날이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다.

              45p  붓꽃 중~~

거실장 한쪽에 놓인 액자 속에는 소양의 부모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칠순이 넘은 소양의 어머니는 남편을 닮은 조금 딱딱한 골격을 드러내고, 아버지는 아낼르 닮은 부드러운 

피하지방에 감싸여 서로 어깨를 붙이고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세월을 정갈하게 숙성한 그런 미소는 인생을 바쳐 교환할 만한 성취였다.  49p

 

앞날이 창창한 스물 일곱살의 무신론자가 제 어미 앞에서 무릎을 꺾을 만큼,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첫 사회생활을 앞둔 각오나 두려움,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여자친구, 선경의 관절염 같은 것이

떠올랐지만 그런 것은 무신론자의 기도와 어울리지 않았다. 사랑히란 그 마음을 상상하고 생각하며 느끼는 

일이라고 하는데, 아들의 마음은 금고 속에 잠겨 있는 비밀 서류 같았다.

다음날 마카오의 아마사원에서, 선경은 제단마다 향을 피우고 그 내용이 무엇이든,

오윤이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

           105p   막연한 각오 중~~

"너도 윤이도 때론 이상했지만, 이만해서 정말 고맙다."

"나도 한땐 비행청소년이었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아빠와 이모가 팔을 더 늘여 안아주어서 엇나갈 수도 없었어요."

"그래. 네 아빠와 난 겨드랑이를 찢어가면서, 아파하면서 계속 팔을 늘였지."

"이모는 이제 이모부, 그러니까 윤이 아버지와 감정적으로 다 해결되었어요?"

"그래 , 그렇게 되었어. 그렇게 되고 나서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알겠더라. 자기 인생 전체를 수렴해 현재를 살기

위해선, 그러지 않을 수 없어."

"난 내가 나의 원수인데."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는 건 나를 사랑하는 일이에요."   112p

 

차를 몰고 전원주택 마을을 빠져나왔을 때, 기후는 도롯가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서로 눈이 마주치자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웃을 일인지 아닌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웃음이 서로에게 공명되어 더욱 고조되었다.

내장이 떨릴 지경이었다. 웃음 사이로 외영은 딸꾹질하듯 말을 이었다.

"실제 삶이 없다면, 풍경은 얼마나, 지루한, 것이겠어요. 또 풍경이 없다면, 실제 삶은 얼마나, 비루한 것일까요..." 

엉뚱한 화법이지만 기후는 공감했다 . 아마도 서로를 뒤섞은 웃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풍경이 영혼으로 들렸다. 실제 삶이 없다면 영혼은 얼마나 지루할 것인가. 또 영혼이 없다면 실제 삶은 얼마나

비루할 것인가.       

            135p   사구미해변 중~~~

 

나는 뇨만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럴 때 차마 있는 그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건 미덕일까, 악덕일까.

단순히 예의를 지키기 위해 얼버무리는 나쁜 버릇일까, 혹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일까. 할 말을 삼키는 것과

숨은 의미를 뒤늦게 알아채는 것, 이 두가지는 내 인생의 근본적인 결함이자 모든 트러블의 원인이었다.

앞엣것은 일을 키우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흘로가게 해 대개는 일주일 안에 나에게 상처로 돌아오고,

뒤엣것은 손쓸 수 없이 시간이 흘러간 뒤에 비가역적인 운명이 되었다.

두 개의 어긋남 중 더 심각한건 당연히 뒤늦게 알아채는 아둔함이었다.

이르면 한 시간 뒤나 일주일 뒤에, 늦으면 삼 년이 걸리기도 했지만, 어떤 일은 십 년이 흘러서야 알아챈 적도 있었다.

내 인생에선 늘 그랬다. 그래서 삶은 늘 어긋나고 미끄러지고 뒤엉켰다.

            195p   굿바이 R중~~~

캔자스의 <Dust in the Wind>가 나올 때 뇨만은 뒷자석에 앉은 내게로 고개를 돌리고 그 노래들을 아는지 

큰 소리로 물었다.

먼지처럼 낡아버린 노래야, 라고 나는 대답했다.

스무 살 시절에는 신비로운 노래였지만 그 노래의 가사처럼, 이젠 오래된 노래란 것도 무한한 바다의 한 방울

물일 뿐이었다. '대지와 하늘 외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바람 속의 먼지일 뿐입니다.'

뇨만은 그것 역시 좋은 의견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뇨만은 그 오래된 노래들을 매개로 계속 말을 걸었다. 아마도 낯선 손님과 첫 대화의 문을 여는 영업 방식 같았다.

그는 온갖 나라에서 온 온갖 손님을 픽업하는 차 안에서 그런 식으로 말의 물꼬를 트는 것이다.

성별과 나이에 관계없이,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살았든 누구나 어느 한 시기쯤은 그런 오래된 팝송과 감정적 

동행을 했을 테니까. 나 역시 그랬다.      197p

"큰 형은 어릴 때 죽었어. 둘째는 일찌감치 자카르타로 떠났고.... 신의 질서는 자주 부서져 . 우리는 그것도 받아들여야 해. 내가 어머니를 모셔서 신이 기뻐하셔. 난 이 집을 지을 때 가족 사원도 모셨어. 난 큰 형을 대신해 사는거야."

"누구를 대신해 산다는 거 이상하지 않아? 너 자신은 어떻게 해?"

뇨만이 웃었다.

"셋째의 자리를 메우고 살든, 첫째의 자리를 메우고 살든 마찬가지야. 우린 원래 빠져나간 자리를 메우고 사는 존재일 뿐,

자신이란 아무 의미도 없어. 신이 시간을 초월한 세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도 순환 반복하며 나타나고 돌아가는 거야.

너 자신에게서 의미를 찾으면 길을 잃게 돼. 원래 없는 것을 찾기 때문이야."     220p

뇨만의 말대로 몸을 써서 경험하는 것이 여행이다.

돌아가면 그래도 뇨만이 강요해 억지로라도 다닌 장소와 먹은 음식들이 기억에 남을 것이다.

뇨만은 그것을 알기에 당당하고 뻔뻔했다. 뇨만은 인생을 닮았다. 무엇을 하든 무의미한데도 불구하고, 무슨 짓이든 

하도록 끊임없이 강요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생에 관한 한 그게 옳다.       237p

바롱댄스는 선과 악의 이야기래요. 특이한 건, 우리나라 전통처럼 악을 벌하는 권선징악이 아니에요. 이곳에선 

선과 악을 공존하면서 끈임없이 대립하는 생명력으로 여긴대요. 살아 있음의 역동인 거죠.

"삶은 선하고 악한 거예요."

"뇨만처럼요?"

"호연처럼, 난처럼."

"아, 그 말, 이상하게 힘이 솟네. 그렇지 않아요?"

나는 동의했다. 산다는 건 결국 자기 의지와 입장을 지켜가는  일이니까.       241p

 

나는 모든 여자에게서 R의 일부를 발견했다. 호연도 처음부터 R과 같은 부류였다. 삶의 표면 위로 튀어오르는 섬광 같은

기쁨과 심연으로 가라앉는 영원한 그늘 사이에서 모든 여자의 불안과 외로움, 좌절과 질투와 결핍과 우울, 가난과 사치와 

슬픔과 공허, 그리고 상실과 해독되지 않고 쌓여만 가는 독은, 같은 것을 나눈 듯 서로 닮아 있었다            25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