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 도서관에서

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장편소설

아라모 2021. 11. 28. 15:46

 

김연수가 들려주는 월북작가 시인 백석의 이야기.

그는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진 언어의 세계를 떠날 수 없었다.

평생 혼자서 사랑하고 몰두했던 자신만의 그 세계를.

북한에 살면서 시 쓰기를 그만 두기까지 7년의 생을 다룬 소설.

 

그 순간, 기행이 가꿔온 믿음의 세계는 단숨에 무너졌고, 그 후의 삶은

왜 그래야만 했는지 따져보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189p -

 

왜 그래야만 했는지 묻는 기행에게 이천육백 년 전의 시인이 대답했다.

그 까닭은 우리가 무쇠 세기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러니 시대에 좌절할지언정 사람을 미워하지는 말자고.

운명에 불행해지고 병들더라도 스스로를 학대하지 말라고.

Ne pas se refroidir, Ne pas se lasser(냉담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

다정한 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있으면 행동해야지. 야심 많은 현의 목소리도 들렸다.

비록 다가갈 때 인간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제우스가 불행과 병에게서 말하는 재주를 빼앗았다고 할지라도.

그리하여 언어를 모르는 불행과 병 앞에서 시인의 문장이 속수무책이라고 할지라도.

앞선 세대의 실패를 반복하는 인간이란 폐병으로 죽어가는 아비를 바라보면서도

한 가지 표정도 짓지 못하는 딸과 같은 처지라고 할지라도. 그럴지라도...

 

기행을 매혹시킨 불행이란 흥성하고 눈부셨던 시절,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의 결과물이었다.

다시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랑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불행해지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아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일들은 소설이 된다고 믿고 있었다.

소망했으나 이뤄지지 않은 일들, 마지막 순간에 차마 선택하지 못한 일들,

밤이면 두고두고 생각나는 일들은 모두 이야기가 되고 소설이 된다.

195812, 북한의 백석은 삼수의 협동조합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의 내 나이와 같았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동갑의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저 사랑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 기행에게는 덕원신학교 학생들의 연주를 들려주고

삼수로 쫓겨간 늙은 기행에게는 상주의 초등학생이 쓴 동시를 읽게 했을 뿐.

그러므로 이것은 백석이 살아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자,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던 소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백석은 1996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나는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된 그를 본다.

작가의 말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