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 도서관에서

빛의 과거

아라모 2021. 11. 28. 15:40

 

빛의 과거 - 은희경 장편소설 -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너에게 난 어떻게 기억되었을까?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닌 것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

시작되는 빛났던 청춘시절의 이야기.

소설을 쓴 그녀는 김유경과 몇 번 만나고 오랜 기간 관계를 유지해온 사이이지만

친밀한 것도 아니고 서로에게 애정을 느끼지도 않는

평행선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관계다.

 

그 시절 우리에게는 수많은 벽이 있었다.

그 벽에 드리워지는 빛과 그림자의 명암도 뚜렷했다.

하지만 각기 다른 바위에 부딪쳐 다른 지점에서 구부러지는 계곡물처럼

모두의 시간은 여울을 이루며 함께 흘러갔다.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때 우리 모두는 막연하나마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지금과 다를 거라고 믿었다. - 193p

 

그녀는 퀴즈식 화법을 즐겼지만 나(김유경)는 그처럼 남을 떠보는 듯한 대화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외로워서 그래. 그래서 나를 주인공으로 해서 편집한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우겨서 내 편을 많이 만들려고 쓰는거야

우기면 다 진실이 되는 거고 말이지.”

너 그거 알아?”

김희진은 되레 내 말투를 지적했다.

그렇게 삐딱한 화법을 쓴다고 지적으로 보이지 않거든.”

그러고는 하던 말을 이어갔다.

진실이 어디 있어. 각자의 기억은 그 사람의 사적인 문학이란 말 못 들어봤니?”

우리가 아는 자신의 삶은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은 과거를 편집한 것일지도....

본인이 받아들이고 싶은 부분만 기억하거나

왜곡해서 사건을 생각하는 등 여러 사람이 같은 경험을 공유해도 기억은 다른 것처럼 말이다.

 

모범생들은 눈치를 본다. 문제를 낸 사람과 점수를 매기는 사람의 기준,

즉 자기를 어디에 맞춰야 할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답을 맞히려는 것은 문제를 내고 점수를 매기는 권력에 따르는 일인 것이다.

그렇게 그저 권력에 순종했을 뿐이면서 스스로의 의지로 올바른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모범생의 착각이다.

그 착각 속에서 스스로를 점점 더 완강한 틀에 맞춰가는 것이다.

다행히 나는 진짜 모범생은 아니었다.
나는 부모와 고향을 떠나는 순간 거짓 순종과 작별할 생각이었다. (116~17p)

그녀에게는 그 시절 내가 겪어야 했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다름’과 ‘섞임’의 세계가 있었다.
그 시절 우리에게는 수많은 벽이 있었다.

그 벽에 드리워지는 빛과 그림자의 명암도 뚜렷했다.

하지만 각기 다른 바위에 부딪쳐 다른 지점에서 구부러지는 계곡물처럼 모두의 시간은 여울을 이루며 함께 흘러갔다.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때 우리 모두는 막연하나마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지금과 다를 거라고 믿었다. ( p. 193)

고향 친구들은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만나면 으레 듣게 되는 변했다거나 변하지 않았다는 말, 둘 다 싫었다.

예전에 알았던 익숙한 풍경 모두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저만치 멀어져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내가 그곳으로부터 밀려났거나 겉도는 느낌이었다. 고향도 아니고 고향이 아닌 것도 아니었으며

집도 아니면서 집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불현듯 깨달았다. 첫사랑의 죽음에는 애도 기간이 필요 없다.

나에게 그 여름은 주인공이 죽어버려서 더 이상 뒷얘기가 중요하지 않게 된 비극의 에필로그 같은 것이었다.

아니 주인공의 죽음과 상관없이 비극에는 에필로그가 필요 없다.

잊는 것만이 완전한 애도이다. 스무 살 나의 여름과 함께. (p. 233~34)

비관은 가장 손쉬운 선택이다.

나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적게 소모되므로 심신이 약한 사람일수록 쉽게 빠져든다.

신체의 운동이 중력을 거스르는 일인 것처럼, 낙관적이고 능동적인 생각에도 힘이 필요하다.

힘내라고 할 때 그 말은 낙관적이 되라는 뜻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낙관과 비관의 차이는 쉽게 힘을 낼 수 있는지 아닌지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역설적인 점은 비관이 더 많은 희망의 증거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어둡고 무기력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관을 일삼는 사람이야말로 그것이 깨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자신 같은 비관론자도 설득될 만큼 강력한 긍정과 인내심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유일하게 그 희망을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히게 된다.   
(p. 3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