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 박완서 에세이 -
‘소박하고, 진실하고..... 단순해서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 작가.
프롤로그 따뜻한 사랑의 입김으로 -호원숙 -
1970년부터 2010년까지 생전에 쓰신 660여편의 에세이 중에서
추린 글들을 다시 살펴보면서 글쓴이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에게 사랑의 입김을 불러넣어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젊은이들이 밝고 자유롭게 미래를 펼쳐가기를 얼마나 기원했는지,
하찮은 것에서 길어 올린 빛나는 진실을 알려주려고 얼마나 고심했는지,
생의 기쁨과 아름다움에 얼마나 절절하게 마음이 벅찼는지.
그러면서도, 자신에게는 얼마나 정직하고 엄격했던지 그 담금질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죽고 싶었던 두려운 마음을 고백하며 쓴 글에서 ‘오늘 살 줄만 알고 내일 죽을 줄 모르는 인간의 한계성이야말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는 대범한 목소리에 기운을 차립니다.
가끔 얼토당토않은 것끼리, 또는 정반대되는 것끼리 묘하게 닮아 보일 때가 있다.
이를테면 한 달에 10만원 수입에서 7만원을 저금했다는 거짓말 같은 사실의 주인공과 남의 돈 내 돈 없이 몇십억 몇백억을 주무르고 사치의 극을 누린 큰손을 가진 사람이 닮아 보일 적이 있다.
그 지나침 때문에.
지나치면 만고의 미덕이라는 절약도 아름답지가 않고, 누구나 누리고 싶어 하는 부도 혐오스럽게 된다.
내가 반 평도 안 되는 현관에 수북이 산처럼 쌓인 헌 구두를 망연히 바라보면서
이멜다의 구두를 연상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 79p -
소녀는 그 각고의 대작을 선뜻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천사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내 친구 아들의 일그러지고 그늘진 ‘병신’다움이 떠올라 가슴이 저렸다.
우리의 정박아가 천사 같지 못한 게 어찌 그 부모 탓만이랴.
우리 모두의, 정말 관심 있어야 할 곳에 대한 무관심,
인간다움보다는 물질적인 것에 대한, 내면보다는 외양에 대한 열광이 남은
능히 천사 같은 인간으로 가꿀 수 있는 장애자를
‘병신’으로 방기한 게 아닐까. - 85p -
다행히 집 앞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요새 같은 장마철엔 제법 콸콸 소리를 내고 흐르지만 보통 때는 귀 기울여야 그 졸졸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물소리는 마치 다 지나간다, 모든 건 다 지나가게 돼 있다, 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그 무심한 듯 명랑한 속삭임은 어떤 종교의 경전이나 성직자의 설교보다도 더 깊은 위안과 평화를 준다 - 111p -
그때 만난 어떤 수녀님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래, 내가 뭐관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을 나에게만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된다고 여긴 것일까.
그거야말로 터무니 없는 교만이 아니었을까.
그 수녀님은 아직 서원도 받기 전인 예비 수녀님이었다.
그러나 학덕 높은 현자보다도,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일컬어 지는 성직자보다도 더 깊은 가르침을 나에게 주었다. 그건 깊다기보다는 아마 적절한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128p -
나는 이런 보답의 기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외손자 사랑이 좋다.
손자야, 너는 이 할미가 너에게 쏟은 정성과 사랑을 갚아야 할 은공으로 새겨둘 필요가 없다.
어느 화창한 봄날 어떤 여자와 함께 단추만 한 민들레꽃 내음을 맡은 일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건 아주 하찮은 일이다.
나는 손자에게 쏟는 나의 사랑과 정성이 갚아야 될 은공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정서로 남아 있길 바랄 뿐이다. 나 또한 사랑했을 뿐 손톱만큼도 책임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내가 불태운 것만큼의 정열, 내가 잠 못 이룬 밤만큼의 잠 못 이루는 밤으로 갚아지길 바란 이성과의 사랑,
너무도 두렵고 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려 본능적인 사랑 또한 억제해야 했던 자식사랑........
이런 고달픈 사랑의 행로 끝에 도달한, 책임도 없고 그 대신 보답의 기대도 없는 허심한 사랑의 경지는
이 아니 노후의 축복인가. -148p -
아이들은 예쁘다.
특히 내 애들은. 아이들에게도 과도한 욕심을 안 내고 바라볼수록 예쁘다.
제일 예쁜 건 아이들다운 애다. 그다음은 공부 잘하는 애지만 약은 애는 싫다.
차라리 우직하길 바란다. 활발한 건 좋지만 되바라진 애 또한 싫다.
특히 교육은 따로 못 시켰지만 애들이 자라면서 자연히 음악.미술.문학 같은 걸 이해하고
거기 깊은 애정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커서 만일 부자가 되더라도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일반적인 수준에 자기 생활을 조화시킬 양식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아는 것이 많되 아는 것이 코 끝에 걸려 있지 않고 내부에 안정되어 있기를 .
무던하기를 . 멋쟁이이기를. - 151p -
나는 요새 남들이 거의 안 쓰는 베보자기를 여러모로 애용하고 있다.
음식을 덮어 놓기도 하고 만두 속이나 제육을 거기에 싸서 누르기도 하고 약식이나 빵을 찔 때 깔고 찌기도 한다.
음식에 닿는 섬유는 베가 아니면 딱 질색이다.
그 정갈하고 시원하고 성깔 있고 소박한 섬유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 158p -
자랑할 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는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216p -
오래 행복하고 싶다.
오래 너무 수다스럽지 않은,
너무 과묵하지 않은 이야기꾼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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