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에서 하늘보기 - 황현산의 시 이야기 -
예술은 자주 그 무용한 사치와 그 과격한 사보타주로 현실의 억압을 비껴간다. 억압이 없는 삶은 물론 없다. 인간관계와 사회제도를 말하기 전에, 지극히 섬세한 물질이지만 여전히 물질인 우리의 육체가 우선 물질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저 고아원의 불행한 아이는 외국의 자선가가 한 해에 한 번 보내준 내용 없이 아름다운 카드로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생명을 부지해준 것은 그의 선물을 가로채기도 했을 고아원 관리자들이 인색하게나마 제공해주던 밥과 옷과 잠자리였다.
그러나 억압의 저 너머를 꿈꾸지 않는 삶은 없다. 또 다른 삶에 대한 의지가 없다면 물질이 이 까다로운 생명을 왜 얻어야 했으며, 그 생명에 마음과 정신이 왜 깃들었겠는가. 예술가의, 특히 시인의 공들인 작업은 저 보이지 않는 삶을 이 보이는 삶 속으로 끌어당긴다. 그의 사치는 저 세상에서 살게 될 삶의 맛보기다.
그 괴팍하고 처절한 작업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은 이 분주한 달음박질에서 한 걸음 비켜서서, 내가 왜 사는지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묻기를 두려워하는 지쳐빠진 마음이다.
- 31p 사치와 사보타주 中 -
이방인은 마침내 “흘러가는 구름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구름은 만질 수도 붙잡을 수도 없다. 구름은 온갖 모습을 다 짓지만 흘러가는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구름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 48p 딴 나라에서 온 사람처럼 -
<임을 위한 행진곡>은 한 시대의 슬픔과 한 시대의 희망과 한 시대의 위업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이 희망의 무한 원칙에 의해 시대를 넘어서서 혹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독립군들이 만주 벌판에서 불렀어도 좋았을 노래가 되고,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형장에서 부르기를 마다하지 않았을 노래가 되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거룩한 자비심에서 우러난 비원이 거기 있고,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문득 자기를 돌아볼 때의 은혜가 거기 있으며, 문학적으로 말한다면 고양된 열정으로 성화된 정신의 시적 상태가 거기 있다.
- 89p <임을 위한 행진곡을 위해> -
집시들은 처음부터 나라가 없기에 늘 없는 나라로 간다. 제 나라에서 가족과 함께 살 수 없었을 뿐더러 가난과 몰이해와 고독의 한계에까지 밀렸던 이중섭에게는 “따뜻한 남쪽나라”밖에 다른 나라가 없었다. ‘길 떠나는 집시’의 가장과 ‘길 떠나는 가족’의 가장은 눈과 소능로 하늘을 더듬지만, 그들이 찾는 것은 거기 없다.
- 150p 길 떠나는 가족 -
만해의 시는 이렇듯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그 성의의 힘으로 어떤 절대적인 존재를 ‘님’의 모습으로 형상하고, 그 존재 앞에서 지녀야 할 마음의 자세를 성찰하고, 그 존재를 인간의 육체로 감지하는 희귀한 경험 하나를 한국 문학에 끌여들였다. <님의 침국>의 시편들은 우리의 몸으로 체험한 ‘절대 드라마’를 현대시 형식으로 기록한 최초의 한국어 택스트에 해당한다.
- 165p 만해의 ‘이별’ -
박정만보다 더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오랫동안 감옥살이를 했던 사람들은, 매우 고독했지만, 그러나 저 ‘무기력한 힘들’이 항상 등 뒤에 있음을 모를 수 없었다.
‘운동’의 한 진실이 그와 같다. 힘찬 목소리로 떠받들린 전설 속에서 무기력한 진실을 끌어내는 일은 쉽지 않지만, 공식적인 역사 서술의 뒷자락에서 문학이 해야할 일이 실상은 그것일 터다.
- 180p 박정만의 투쟁 -
그는 길도 없이 황무한 땅을 헤매야 하고, 진흙탕 속에까지 내려가 거기 가라앉아 있는 어떤 정수를 길러내야 할 것이다. 그는 자주 자신이 무엇을 써야 하는지, 무엇을 쓰고 있는지, 무엇을 썼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는 끝내 비밀을 지키려는 것들의 입을 강제로 열기도 해야 할 것이다.
- 201p 신춘문예를 생각한다 -
“이미지를 지워버릴 것, 이미지의 소멸, ......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아니라,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뭉개버리는 일. 그러니까 한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로 하여금 소멸해가게 하는 동시에 그 스스로도 다음의 제3의 그 것에 의하여 꺼져가야 한다. 그것의 되풀이는 리듬을 낳는다.”
- 241p 사물이 된 언어 또는 무의미의 시 -
보석 같은 석류 알의 붉은 매혹이 혹시라도 그 진정된 마음에 혼란을 가져온다면 개울을 마저 건너기 어렵다.
시인은 저 언덕으로 고개를 돌린다. 석류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그 눈을 빈한한 삶만이 허락해주었기에, 또 다시 고고한 수세의 태도로 그 가난을 지켜야 한다는 듯이...
- 261p
시 쓰기는 끊임없이 희망하는 방식의 글쓰기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시가 말하려는 희망은 달성되기 위한 희망이 아니라 희망 그 자체로 남기 위한 희망이다. 희망이 거기 있으니 희망하는 대상이 또한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 희망이다.
꽃을 희망한다는 것은 꽃을 거기 피게 한 어떤 아름다운 명령에 대한 희망이며, 맑은 물을 희망한다는 것은 물을 그렇게 맑게 한 어떤 순결한 명령에 대한 희망이다. 시를 읽고 쓰는 일은 희망을 단단히 간직하는 일이다. - 262p 시인의 적토마 -
산문은 이 세계를 쓸고 닦고 수선한다. 그렇게 이 세계를 모시고 저 세계로 간다.
그것은 비의 방법이 아니다. 시가 보기에 쓸고 닦아야 할 삶이 이 세상에는 없다.
시는 이를 갈고 이 세계를 깨뜨려 저 세계를 본다. 시가 아름답다는 것은 무정하다는 것이다.
- 271p tl 무정한 깃발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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