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 도서관에서

어떤 물질의 사랑 - 최선란 소설집

아라모 2024. 6. 4. 16:08

 

"물론 지구에 살고 있으면 전부 지구인이겠지만."

"그럼 제가 외계인이라는 거예요?"

"그게 뭐가중요해요. 지구의 절반은 외계인이에요. 모두가 다 사람인 척하고 있을 뿐이라고요,

웃긴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이건 생각보다 중요해요. 그걸 알아야 해요. 이 지구에 같은 인간은 없어요. 모두가 다 서로에게 외계인인 걸, 모두가 같은 사람인 척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요."

            - 143p

 

"라현아, 끊임없이 사랑을 해. 꼭 불타오르는 사랑이 아니어도 돼. 함께 있을 때 편안한 존재를 만나. 그 사람이 우주를 가로질러서라도 너를 찾아올 사랑이니까. 너는 지구인이니까. 네가 이곳에서 태어났으니까. 지구인일 수도 있고 외계인일 수도 있지만 그건 걱정 마. 이곳에 있는 모두가 서로에게 외계인이니까."

"결국 너는 너야. 끝까지 무엇이라고 굳이 규정하지 않아도 돼."

이 사랑은 어떤 물질로 이루어진 사랑일까. 나를 꽉 끌어 안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이 미적지근한 온도의 사랑은. 엄마가 내게 마지막으로 알려준 것은 온도였다. 이 온도를 기억하고 있다가, 이런 온도의 존재를 만나야 한다고.

              -  152p

 

상처받지 않는다는 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보호막이었어. 사람이 사람을 잔인하게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지쳐 있었으니까.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면, 그래서 나를 비롯해 곁의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을 수만 있다면 감정을 잃더라도 모두가 감내할 수있다고 믿었어. 세상은 더 평화로워질 거야. 분쟁과 전쟁이, 다툼과 사냥이 전부 사라질 거야. 간결하고 깔끔하게 지구가 변하겠지. 우리는 그게 간절했어. 네가 있었다면 너 역시도 수술을 받았을 거라 생각했어. 그러니까 도아야, 너는내가 너를 잃더라도 너를 이 세상에서 지킬 수만 있다면 수술을 받게 했을 거야.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 이해할 수 없을 거고. 내가 지금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 196p

 

내가 가족들을 가장 늦게 만났잖아. 늦게 태어났으니까. 그 단단한 결속력, 나는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에 쌓았을 추억, 그런 걸 감내하고 버텨야 하는 자리라고, 막내가.

그런 의미로 애교란 살아남기 위한 생존수단인 셈이지. 나는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라는 어필. 마치 강아지나 고양이가 주인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애교를 부리듯이. 언니는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 언니가 태어났을 때는 언니 혼자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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듬직함이 나의 생존수단이었어.  이 사람들에게 버림받지 않게 위해서 자신들이 낳은 첫 자식은 멋진 사람이라는 믿음을 줘야 했거든.

                                     -   235p  236p -

 

이 땅에 신이 있던가. 우주에는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행성에는 신이 없다.

저들이 지구로 침략하며 신을 쏴 죽였을 것이다. 그러니 결국 지나의 기도는 중얼거림에 지나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계속 중얼거렸다. 믿는 건 기도를 듣는 사람의 힘이 아니다. 말의 힘이었으니까     -  253p

 

과학기술부는 그제야 결코 줄어들지 않는 사망률 1.4퍼센트 속 사망자들의 관계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예측 범위 밖에 있던 좌석 간의 관계가 있었고, 더깊숙이는 감정이 있었다. 간과한 부분이기는 했으나 놀라운 결과는 아니었다.

감정은 때로 전쟁을 일으키게 했고, 때로 인간을 불가능에 도전하게도 했다. 그것이 결단코 옳기만 한 방향은 아니겠으나 어쨌든 감정은 인류의 멱살을 쥐고 미래를 행해 나아갔다. 그러니 기술이 다시 한 번 감정을 앞서나가야 할 순간이 온 것뿐이었다.        -   30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