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 도서관에서

the romantic movement (우리는 사랑일까) 알랭 드 보통

아라모 2022. 9. 28. 18:02

 

앨리스는 '관계'라는, 의사 불소통의 우스운 연속을 익히 잘 알면서도, 인정할 수 없을 정도로 열정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살아왔다. 자신의 반쪽을 만나리라는 생각을 유치하지만 고집스럽게 잃지 않았다.

냉소도 지겹고 본인과 타인의 결점만 찾아내는 것도 지겨워진 그녀는, 다른 사람을 향한 감정에 휩싸이고 싶었다. 선택의 여지 따위가 없는 , 한숨지으며

"하지만 그이와 내가 정말 어울릴까?" 하고 물을 새도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기를 바랐다.

분석이나 해석 따위가 불필요하고, 물을 필요도 없이, 상대가 자연스레 존재하는 상황을.     -8p

 

하지만 앨리스는 신을 믿지 않았고, 예술과 사랑이 신의 역할을 해주기를 바랐다.

영화가 '나만 이런 감정을 겪으며 이 거리를 보고 카페에 앉아 있는 게 아니야.....'하는 생각을 통해

고립감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듯이, 사랑은 그녀가

'당신도 느끼나요? 정말 근사하죠...... 할 때 내가 바로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하고 속삭일 수 있는 사람을 희망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한 영혼이 다른 사람의 영혼과 미묘하게 닮았음을 발견한다는 것의 실체이다.     -36p

 

순전히 기술적인 관점에서는 성생활의 역사가 있는 편이 바람직하겠지만, 심리적으로 그것은 복잡 미묘한 영향을 미쳤다. 성생활 역사가 있다는 것은 여러 사람과 성행위를 했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잠자리를 같이한 사람을 차거나 그 사람에게 채였다는 뜻이었다.

좀 어두운 면에서 보자면 섹스 기교의 역사는 실망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성행위 과정에는 묘한 긴장이 흘렀다. 한편으로 두 사람은 열정을 통해 세상을 재창조하는 것 같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몸짓에는 지나와야 했던 과거의 증거가 담겨 있었다       - 65p

 

엘리스가 지금 에릭을 [신중하게 말해서] 사랑하는 것일 리가 없다면, 그녀는 아마 사랑을 사랑한 것이다.

이 동어 반복적인 묘한 감정은 무엇인가? 이것은 거울에 비친 사랑이다.

감정을 자아내는 애정의 대상보다는 감정적인 열정에서 더 많은 쾌감을 도출하는 것을 뜻한다.

사랑을 사랑하는 연인은 단순히 X가 멋지다고 여기지 않고,

'X처럼 멋진 사람을 찾아냈다니 대단하지 않아?' 하는 생각을 먼저 한다.          -73p

 

경제의 세계에서는 빚이 나쁜 것이지만, 우정과 사랑의 세계는 괴팍하게도 잘 관리한 빚에 의지한다.

재무 정책으로는 우수한 것이 사랑의 정책으로서는 나쁠 수가 있다.

사랑이란 일부분은 빚을 지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뭔가를 빚지는 데 따른 불확실성을 견디고,

상대를 믿고 언제 어떻게 빚을 갚도록 명할 수 있는 권한을 넘겨주는 일이다.

에릭은 빚을 제때 갚긴 했지만, 앨리스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너무 급하게 빚을 갚고 그대로 잊어버리는 바람에, 그 남자는 그녀와 똑같은 감정의 성숙을 실현하지 못했다.          -140p

 

여행은 흥미롭게도 지리적이라기보다 심리적인 활동으로 읽을 수 있다.  외적인 여정은 내적으로 욕망하는 여정의 은유다. 네팔에서 히말라야를 오르고, 카리브 해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고, 로키 산맥에서 스키를 타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파도타기하고, 이런 것들은 이국적이고 유익하지만, 훨씬 심오한 동기를 가리는 시시한 변명에 불과하다.

그 동기란 여행을 예약하는 자신이 이런 것을 즐기는,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다.   

여행사는 비행기 표와 호텔 방 예약, 보험 가입 같은 사소한 일을 처리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의 기본 업무는 여행 상품을 사면 기적처럼 자신을 남겨두고 떠나게 되리라는 미묘한 환상에 근거한다.

'나'가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 여행이 '나'를 바꿔주리라는 생각이다            -282p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점을 과장하는 흥미로운 과정" - 죠지 버나드 쇼 -

 

삶과 관계를 바라보는 뛰어난 통찰력이 담긴 현대적이고 풍요로운 언어는 소설읽기에 재미를 더해준다.

이런 언어 미학은 알랭 드 보통이 독자에게 안겨주는 선물이다.

'둘이 같이 있는데도 각자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것'

사랑을 인생의 전부로 여기는 '로맨틱한' 생각을 하는 앨리스와

만남을 시작한 후에는 독단적이고 평범하게 변해버리는 것을 당연시하는 에릭.

두 사람의 연애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연애나 결혼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어쩐지 이가 맞지 않는 감정의 괴리'가 어디에 기인하는지, 밖에서 보면 그것이 어떤 모양새인지 명쾌하게 보여준다. 

이런 작가와 소통하는 것,

또 앨리스가 따뜻하고 배려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사랑에 냉소적인 것 같던 작가가

따듯한 마음이 깃든 사랑에 대해 내비치는 희망, 그것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398p 역자 공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