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매일매일 - 백수린 산문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내게 작은 바람이 있다면 일고 쓰는 나날을 기록한 소박한 글들이 온기, 라는 단어와 어울렸으면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고양이가 앉았던 자리만큼의 온기가 되어주었으면.
이상하고 슬픈 일투성이인 세상이지만 당신의 매일매일이 조금은 다정해졌으면,
그래서 당신이 다른 이의 매일매일 또한 다정해지길 진심으로 빌어줄 수 있는 여유를 지녔으면,
세상이 점점 나빠지는 것만 같더라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안녕을 빌어줄 힘만큼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을 것이므로. 그런 마음으로 당신에게 이 책을 건넨다. -작가의 말 중 -
어린 시절 나를 무섭게 만드는 것은 비현실의 세계였다.
귀신이나 지옥처럼, 누구도 명료하게 그 존재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것들,
그런데 이제는 오히려 너무나 명료한 것들이 더 두려울 때가 있다.
이를테면 칼로 벤 자국처럼 선명한 말이나 확신에 찬 주장 같은 것들.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음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이상한 신념들.
지나치게 눈부신 빛 속에 서 있다는 생각에 갑작스럽게 현기증이 나고 두려워지면,
언젠가부터 나는 기꺼이 어스름 쪽으로 눈을 돌린다. 창가에 어린 입김과 계절과 계절 사이의 바람 냄새,
새벽에 내리는 첫눈과 말이 되지 못한 채 기척으로만 존재하는 마음 쪽으로.
붙잡으려는 순간 사라짐으로써만 존재하는 어떤 것들이 지닌 아름다움을 나는 무척 사랑한다
- 54p
소설이 삶을 닮은 것이라면, 한길로 꼿꼿이 가지 못하고 휘청휘청 비틀댄다 해도 뭐 어떤가.
내가 걷는 몸든 걸음걸음이 결국엔 소설 쓰기의 일부가 될 텐데. 길 잃고 접어든 더러운 골목에서 맞닥뜨리는,
누군가 허물처럼 벗어놓고 간 쓰레기들과 죽은 쥐마저도 내 빵에 필요한 이스트나 밀가루가 될 텐데.
그러므로 그림자처럼, 한 낮의 시간에는 더욱 짙어지는 익숙한 열등감과 수치심이 찾아오면,
이제 나는 그것들을 양지바른 곳에 펼쳐놓고 마르길 기다리며 찬찬히 들여다본다.
오븐의 열기는 하오의 볕처럼 공평하니까 어쩌면 내가 소설을 쓰는 사람인 한,
나에게도 언젠가는 따뜻한 식빵 한 덩이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믿어보면서.
- 64p
당신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아요.
책을 읽으면서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중얼거린다.
당신은 우유부단하다는 말을 듣더라도, 판단을 마지막 순간까지 유보하는 사람,
겉으로 드러나는 사실만 가지고 손쉽게 누군가에게 선이나 악으로 꼬리표를 붙이려 하는 순간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실제로 기시 마사히코 씨를 만나면 나는 쑥스러워 아무 말도 못 건네겠지만,
그와 직접 말해보지 못하더라도 아무런 문제는 없다.
세상 어딘가에 나와 공명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오래전부터 많은 작가들과 이런 식의 특별한 우정을 남몰래 쌓아왔다 - 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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