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 도서관에서

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 - 전경린 -

아라모 2021. 12. 20. 19:40

 

 

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 - 전경린 장편소설 -

 

 

"어떤 일은 단 한 번 일어났다 해도 영원히 계속된다.“

너를 기억하는 나의 이야기.

오로지 내가 너를 기억하는 힘으로 써내려간 우리의 이야기.

 

이 소설의 의미나 가치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지만,

내가 얼마나 절실했는지는 안다.

이번 소설을 쓰는 사이에

말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 기분이다. (.........)

모든 말이 너무 깊고 너무 넓고 너무 높은 순간이었다.‘

- 작가의 말에서

 

나는 천천히 숨쉬는 연습을 하곤 했다. 내 호흡을 자각하며 숨을 쉴때면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쓰고 사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일로 느껴졌다. 소비는 가능한 한 줄였다. 긴축하며 지내는 것이 나쁘지만도 않았다. 인생의 흐린 창문을 닦는 기분이었다. 점점 맑아지는 시력으로, 하루가 왔다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는 것을 그저 바라보는 곳으로도 충분했다. 애써 내려놓으려던 마음이 저절로 비고, 금욕과 절약이 몸에 익고, 명상의 시간이 많아졌다.   - 22p -

 

엄마는 잘 계시니?”

사람들은 엄마와의 관계가 얼마나 개인적이고 은밀한 사생활인지 잊은 채 쉽게 입에 올렸다. 마치 하나의 엄마가 세상 모든 엄마인 것처럼 천차만별의 성격을 하나의 단어에 수렴시키는 데도 무리를 느끼지 않았다.

명희는 나의 엄마에 기대어 오래전에 돌아가신 자신의 엄마를 불러보고 싶은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엄마에겐 모든 엄마를 그러모아 말할 수 있는 특성이 있긴 할 것이다.

엄마는 엄마일 수밖에 없고, 엄마가 엄마 아닐 수 없는 인류의 공통 부분. 거기엔 인습적인 강요와 모성의 본능이 구별할 수 없는 형태로 얽혀 있었다.

- 24p -

 

"묻고 싶은 게 있어. 나애, 너는 나를 정말로 원하지는 않는 거니?“

정말로 원하는 것을 잃어버려본 사람에겐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사람은 대개 원하는 것을 갖는 게 아니라 주어진 것을 갖는다.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나는 무언가를 원하지 않는 대신 빚이든, 사람이든, 관념이든, 제도든, 조직이든, 나를 포획하려는 모든 것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남은 것은 내 호흡이 그리는 자유로운 곡선과 가벼운 일상과 우연, 약간의 일탈과 사치로 구성된 소박한 삶이었다.

세계라는 허상의 파도 위에서, 가능한 한 어디에든 갇히지 않고 하루하루 또박또박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했는지 모른다. 희도는 그런 때에 내게 왔다.

아무런 기대로 없이, 떨림도 없이. 내가 원하기 전에, 갈망하기 전에.   - 44p -

 

인간은 타인을 사랑할 수는 있지만 계속할 수는 없다.

스스로 고갈되는 존재이기에 결국 자기중심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기를 통해서 보고 자기의 감각으로 느끼고 자기의 에너지로 욕망하고 자기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이간이기에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의 형편이다 - 95p -

 

"염주는 수십 년 뒤에도 심으면 싹이 나는 신기한 곡식이란다.

백팔의 수는 인간이 감당하는 번뇌의 수인데 열두 달과 이십사 절기와 칠십이 기후를 합친 수와 같아서 우리가 사는 우주의 수이기도 하지.

백팔염주를 부지런히 도리면 지은 업이 벗겨지고 번뇌가 없어진단다.“  - 116p -

 

종려할매는, 사람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합친 존재라고 했다.

바다와 숲에는 인간의 육체 기관 중 일부를 연상시키는 생물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우리는 그런 것을 사용하고 먹는다. 온갖 조개 종류, 개불, 전복, 민달팽이같이 원초적인 생물들뿐 아니라, 다른 생물들, 식물들,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기관의 일부로서, 혹은 성격의 일부로서, 혹은 존재태의 일부로서 인간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현현해 있다.

그러니 모든 생물은 인간의 일부이고 인간은 모든 생물의 일부이다.  - 217p -

 

"부모 자식 사이란 옳고 그른 것도 없이 그저 사람됨으로 감당하는 일인 거 같다.

예쁘게 감당하기도 하고 흉하게 감당하기도 하고. 자식에게는 그 관계가 가장 큰 시련이기도 하지.

나도 그게 참 힘들었지만.“

오원 언니의 말은 아름답고 슬펐다.

사람으로서 감당하고 사는 삶의 감촉이 허공을 떠다니는 오로라처럼 아슬아슬하게 손끝을 부딪치고 간 기분이었다.

- 223p -

 

엄마를 부를까 하다가, 간신히 틀니를 손가락으로 쥐었다. 틀니가 꿈틀대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사람이 삶을 감당한다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신의 한계를 덮어주며 신을 믿는 것과 같은 것이다.  - 234p -

 

그런 게 있었다. 다 알지도 않아도 되는 그런 게.

우리 사이에도 어느새 차이의 긴장과 동질성의 공감을 넘어 다정하고 무심한 자기가 생긴 것 같았다.

나애, 뱀 여인 이야기 말이야. 난 오랫동안 뱀 여인의 이름을 생각해보곤 했어.”

신근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물의 이름을 다 부르고 상상으로 지어내고 모든 글자를 다 조합해 만들고도 알아내지 못한 이름이었다.  - 248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