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 도서관에서

잠옷을 입으렴 -이도우 -

아라모 2021. 12. 20. 19:35

잠옷을 입으렴 - 이도우 장편소설 -

 

당신의 기억 속에 두고 온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존재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의 저자 이도우의 두 번째 장편소설.

이종사촌 자매 수안과 둘녕의 성장과 추억을 그린 성장소설로, 우리가 잊고 살아온 유년의 기억을,

혹은 경험해보지 못한 시절에 대한 향수를 아련히 떠올리게 한다.

 

 

장터에서 산 흔한 잠옷일 뿐이었지만, 오로지 잠을 위한 옷이 생긴다니 기대감으로 두근거렸다.

종일 입었던 내복을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는 일이 왠지 고상하고 격식을 갖춘 일과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다음 장날을 기다리며 밤마다 책을 읽었다.

이모 내외는 둘 다 교사여서 외가엔 학교에서 가져온 읽을거리들이 꽤 꽂혀 있었다.

소년중앙, 어깨동무같은 소년잡지와 마을 이장이 나눠준 어린이 농민과월호도 열심히 읽었다. - 28p -

 

마당에 누워 올려다보는 밤하늘엔 뭇별이 반짝였다.

외가엔 많은 식구가 살았지만 내가 모암마을에서 지내기 시작한 처음 두 해를 돌이켜볼 때, 손을 내밀면 질감이 느껴질 것 같은 식구는 수안과 외할머니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그림자처럼 멀게만 느껴졌고

그들의 적절한 무심함과 거리감이 나를 외롭게도 편안하게도 만들었다  - 44p-

 

", 잘 산다는데도 싫으냐?“

노파가 속을 떠보듯 물었지만 나는 시선을 더러운 방바닥에 고정한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수안이 행복하지 않은데 나 혼자 행복해진다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니, 수안뿐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얻는 행복의 평균이 있다면 나도 그 정도이길 바랐다.

혼자서 더 행복한 건 어쩐지 불안하고, 남의 행복에서 덜어온 듯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세상의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의 양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고 느꼈던 날들이 있었다.

누구 하나가 많이 행복하면 다른 하나가 그만큼 불행할지도 모른다고.

타인의 행복이 커진다고 해서 내 행복이 줄어들진 않는다는 진실을 깨닫기까지는 세월이 많이 걸렸다.

- 54p -

 

누군가의 죽음과 사라져간 것들에 대해, 우리는 인내의 시간을 두고 품위 있게 슬프고 싶었다.

농밀하게 슬픔을 나누고 음미하고 싶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진짜 슬픔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품위 있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 272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