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너로 살고 있니 - 김숨 편지소설 -
“나는 아직도 당신에게 가고 있는 중일까요?”
“나도 가고 있는 중이에요.”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는 중인가요?”
“나도 나에게로.”
무명의 여자 배우가 11년째 식물인간 상태인 한 여자를 간호하기 위해 경주로 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두 사람이 교감하는 이야기, 병원을 둘러싼 인간 군상의 이야기들이 작가의 섬세한 문체로 소설은 편지 형식을 취했다.
봄은 눈멂의 결여라던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내’가 어떤 대상을 본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대상이 보여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볼 수 있다고요.
그렇다면 내가 당신의 눈에 보이기 위해서는, 보여질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어야 하겠지요.
어째서인지 내게는 그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것만 같습니다.
내가 보이나요?
- 16p -
터치(touch)를 의미하는 ‘닿다’를 발음할 때면 혀끝에서 파도가 이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매순간, 어머니의 자궁에서 잉태되는 순간부터 땅 속에 묻혀 소멸하는 순간까지, 그 무엇과 닿으며 살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국어사전에도 나오는 그 문장이 내게는 어째서인지 다르게 읽힙니다.
인간은 만물의 ‘연자延長’이다, 라는 문장으로요
연장을 한글로 풀면 ‘잇닿다’가 되지요 - 21p -
당신과 나 둘 중 누가 찾아왔든, 그것은 우연한 찾아듦일까요.
돌이나 나무 같은 무생물이나 해면 같은 무생물이나 해면 같은 하등동물, 어린아이에게는 우연이라는 것이 발생할 수 없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우연은 ‘의도’를 가진 존재들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의도를 갖지 못한 존재들에게 발생하는 일은 불운도, 행운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의도를 상실한 식물인간에게 발생하는 우연은, 엄밀히 말해 우연이 아닌 걸까요.
돌이나 나무에게 일어나는 일처럼 자연 발생적인 것, 우발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까요.
- 31p -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공중 곡예를 할 때 말이에요, 각자 양 끝에서 그네를 타다 한 곡예사가 허공으로 훌쩍 날아오르면 맞은편의 곡예사가 잡아주는.
허공으로 날아오른 곡예사가 힘껏 손을 뻗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맞은편의 곡예사가 자신의 손을 절대 놓치지 않고 잡아줄 거라고 믿고 손을 뻗을 뿐이라고요.
믿음이 부족해 제 쪽에서 맞은편 곡예사의 손을 잡으려고 하면 백발백중 놓치게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손을 뻗으면, 그 뻗은 손을 잡아줄 거라는 믿음.
허공으로 내던져진 나를 누군가에게 온전히 맡기는 믿음,
그 믿음은 저절로 생겨나는 걸까요. - 44p -
정 선생님은 선함도 재능이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선함은 결코 자랑할 것이 못 된다고요.
재능은 갈고닦아야 빛나는 것이니, 선함 역시 녹슬지 않기 위해서는 갈고닦아야 한다고요. - 55p -
내 안에 고여드는 감정이 혹시 행복이라는 감정이 아닐까요.
행복은 ‘탁월한 행위’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지요.
그러니까 행복은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여름 저녁 바짝 마른 수건을 걷을 때 행복감을 느낍니다.
붉은 자두를 씻을 때, 연둣빛 새순이 돋은 나무를 볼 때, 어느 집 부엌에선가 밥 뜸 드는 소리가 들려오는 골목길을 걸을 때, 몰랑몰랑하고 따뜻한 백설기를 먹을 때..........
탁월한 행위는 장식 없는 소박한 행위가 아닐까 싶습니다.
행위라는 표현마저 거추장스러운 장식이 되어버리는 행위요. - 96p -
어디로 날아갈지 모른다는 점에서 우리 인간의 운명이 씨앗의 운명과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은 저마다 어느 순간 허공으로 날려 어딘가에 내던져 지는 것이 아닐까요. - 118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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