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 도서관에서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 정세랑 여행에세이 -

아라모 2021. 10. 14. 20:24

 

"사랑하는 이들의 세상이 갑자기 무너지지 않기를,

어디선가 다정한 대화들이 계속되기를.“

지구 구석구석 모두의 반짝이는 안녕을 바라며 빛과 사랑의 방향으로 한걸음 나아가는 여행

 

이 지난 여행의 기록들은 사실 여행 그 자체보다는 여행을 하며 안쪽에 축적된 것들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하다.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러 멀리 가서 맞닥뜨린, 이야기보다 더 이야기 같았던 순간들을 마음속 거름망으로 걸러내 정리해 두고 싶었다.

만나고 싶은 마음,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잘 다스리면서 길고 어두운 시기를 지낼 각오를 한다. 오래전의 여행을 꺼내어보니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당연히 여기고 누려왔는지 새삼스럽다. 쑥스럽지만 어떤 날, 우리가 함께 보냈던 짧은 낮과 길게 붙잡았던 밤이 나를 구했다고 친구에게 꼭 이야기하고 싶다. - 본문에서

 

 

어쨌든 좋아하는 것을 열렬히 좋아하는 편이고, 새로 좋아할 만한 것을 만날 준비가 항상 되어 있기도 해서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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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가끔 누가 백억이 생긴다면? 천억이 생긴다면?”하고 가정하는 질문을 던지면 작업을 쭉 따라가고 있는 동시대 작가의 전시회에 가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제가 수집할게요하고 말하는 상상을 해버린다. 그리고 그 작품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전시관을 짓고 도서관도 하나 짓고 기와 지은 김에 공연장까지.... 규모가 커지는 데 몇 초 걸리지 않으니 포부만큼은 CEO처럼 자랐는지도 모르겠다.

41p -

 

그래도 10년 넘게 소설을 쓰면서 알게 된 것은, 사람들이 픽션 속의 캐릭터를 생각보다 자주 닮고 싶어 하고 또 그와 친해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 작업은 사실 남성 창작자들이 해야 하는 것인데 하는 사람이 적은 것 같기도 하다. 남성성의 이미지를 함께 살아가고 싶은 모델 쪽으로 슬쩍 옮기는 것이 효과가 있을지 하는 데까지 해보고 안 되면 다른 전략을 써야겠지만, 세상을 바꾸는 데는 늘 찌르는 전략과 녹이는 전략을 병행되어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리고 나는 녹이는 걸 잘하기에, 자꾸 친구들의 좋아하는 면을 소설 속에 녹인다.

65p -

 

해양 생물관의 돌바닥에 누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거기 누워 있으면 30분쯤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지구는 45억 년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결국 항성과 행성의 수명이 다하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을텐데, 우리는 짧은 수명으로 온갖 경이를 목격하다가 가는구나 싶었다. 경이를 경이로 인식할 수만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특별해질 것이다. 덧없이 사라진다 해도 완벽하게 근사한 순간들은 분명히 있다 자연사 박물관에 갔던 날이 나에게 그랬다.

75p -

 

본격적인 센트럴파트 탐험에 나섰다. 타임스스퀘어에서처럼 겹겹의 경험이 가능했다. 모든 곳이 영화 속, 책 속 인물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쫓기고 싸우고 노래하고 화해하던 장소였다. 그 구석구석을 확인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효과음이 들렸다

퀴즈쇼에서 정답을 맞히면 나는 그런 효과음 말이다. 관광지는 좋아, 유명한 곳은 좋아......., 얄팍하고 완벽하게 행복했다.

91p -

 

소소한 것, 언뜻 무용해 보이는 것, 스스로에게만 흥미로운 것을 모으는 재미를 아는 사람은 삶을 훨씬 풍부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수집가만큼 즐거운 생물이 또 없고 수집가의 태도는 예술가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항상 다니는 길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사람들, 자신이 사는 곳을 매일 여행지처럼 경험하는 사람들이 결국 예술가가 되니까.

한국 어딘가의 길거리에서, 조금 정신없어 보이는 여자가 주저앉아 휴대폰으로 바닥을 찍고 있는 걸 발견하신다면 저일 수도 있겠습니다.....길에 갑자기 주저앉아 사진을 찍는 게 처음만큼 쑥스럽지 않다. 언제나 바쁘고 쫓겼던 마음이 그 순간 새로운 리듬으로 전환되니 말이다. 비용도 들지 않고 공간도 차지하지 않는 근사한 수집 취미를 센트럴파크에서 얻었다고 기록해두고 싶었다.

95p -

 

가끔 몇 년 전에 읽은 책 한 권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집요할 정도로 따라붙으며 잔인한 말들을 하는 이를 맞닥뜨리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정말 어렵다. 마음속의 저울이 잘 작동하는 사람들과만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것 같다. 마음속의 저울은 옳고 그름, 유해함과 무해함, 폭력과 존중을 가늠한다. 그것이 망가진 사람들은 끝없이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힌다. 사실 이미 고장 난 타인의 저울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저 내 저울의 눈금 위로 바늘이 잘 작동하는지 공들여 점검할 수밖에.

107p -

 

왁자지껄하게 여럿이서 먹는 저녁 식사는 즐거웠는데, 식당에 순 한국식 중화요리하 붙어 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 그렇게 어울리지 않으면서 유쾌하게 붙은 순은 다시보지 못했다. 창작자로서 가장 지속적으로 들락거리는 경계가 순과 잡 사이인 것 같다. 건강하게 잡스러운 것들, 잡이면서 능청스레 순인 척하는 것들이 무엇보다 재밌는 요소가 아닐까 한다.

110p -

쌍둥이빌딩이 있던 자리에는 아래로 끊임없이 물이 떨어지는 분수대가 있었다. 분수대를 둘러서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거기 모르는 사람의 이름 위에 손을 얹고 잠시 서 있었다. 한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부정하는 이들을 언제까지고 두려워할 것이다. “그놈들 머리에 폭탄이 떨어지면 좋겠어!”라든가그놈들 발밑에 지진이 나면 좋겠어!”하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을 말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가장 순정한 사람들이 희생된다는 것을 외면하는 독선은 얼마나 독한가? 붕괴에서 살아남은 기적의 너무 한 그루도 있었는데, 다들 그 아래에서 소운 같은 걸 비는 듯했다. 사랑하는 이들의 세상이 갑자기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이 가장 많았을 것이다.

116p -

 

"나는 최대 가능성을 원해.“

최대 가능성이라는 압축적인 다섯 글자로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이 불완전하고 가혹한 세계에서,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성장해보고 싶다고 스스로의 욕망에 이름을 붙였다. 아시아인은 어릴 때부터 겸손과 중용을 교육받으며 자라기 때문에 한 사람의 최대 가능성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시아 여성은 더더욱......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에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그날부터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것이 최대 가능성을 향하는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삼을 수 있었다. 외부로부터, 사회로부터 주입되지 않은 종류의 욕망을 가진다는 것은 사람에게 힘찬 엔진이 되기 마련이기에 우리는 욕망에 대해 더 이야기해야 한다

123p -

 

대중소설을 쓰기 때문에, 다른 장르의 대중적인 작가들을 편들고 싶은 마음도 항상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이해하기 쉬운 작품을 두고 비아냥거리는 경우가 많다. 말초적이고 얕다고, 별것 아니면서 거품만 크다고.... 수십 년째 세계적인 조롱의 대상이 되는 작가들도 있다. 그렇지만 보는 사람들에게서 몇 초 만에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작품을 만드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일이고 소수만이 다다를 수 있는 경지이니 온당한 평가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제프 쿤스를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지만 누구나 50미터 밖에서 제프 쿤스의 작품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146p -

 

아마추어 감상가로서 가슴 두근거리며 생각했다. 사람들은 일찍 귀가해 발걸음 소리도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풀벌레도 날개를 떨지 않는 깨끗한 무음 속을 걸었다. 직접 감각하고서야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예민한 몸을 끌고 다니는게 싫어 여행을 망설이는 자도 계속 여행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요소들에 대해서.

207p -

 

여자들의 삶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하루는 처음으로 부르카를 입은 여자를 보기도 했다. 여자는 혼자 걷고 있지 않았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평범한 랄프 로렌 샤츠와 나이키 운동화 차림이었다. 색색의 평상복 사이에서 혼자 눈만 남기고 검은 천으로 휘감은 모습은 둔중하게 다가왔다. 어디까지가 당사자의 선택이고 어디서부터가 집단적 압력의 결과일지, 존중에서 비롯된 문화상대주의가 폭력에 대한 방관으로 변질되기 시작하는 지점을 어떻게 짚어낼지 항상 어렵게 느껴진다. 세계가 이렇게 망가지고 무너져가는 것은, 이 세계를 복원하고 개선할 가능성을 가진 여성들이 교육과 사회 활동의 기회를 얻지 못해서가 아닐까 두려워하며 추측하기도 한다. 그 여성들이 잃은 가능성은 결국 인류가 잃은 가능성이 될 확률이 높아 조급해지지만, 여성이 극도로 억압받는 지역에서도 의미 있는 움직임들이 보이고 먼 곳에서도 지지를 보내기 예전보다 쉬워진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희망이다.

227p -

 

세상이 망가지는 속도가 무서워도, 고치려는 사람들 역시 쉬지 않는다는 걸 잊지 않으려 한다. 절망이 언제나 가장 쉬운 감정인 듯싶어, 책임감 있는 성인에게 어울리진 않는다고 판단했다. 작은 부분에서 시작된 변화가 확산되는 것은 인류역사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패턴이기 때문에 시선을 멀리 던진다. 합리성과 이타성, 전환과 전복을 믿고 있다. 우리는 하던 대로 하고 살던 대로 사는 종이 아니니까.

254p -

 

결혼과 관련된 이야기를 여러 편 쓰고 내린 결론은 결혼은 누구나 할 수 있으면서 아무도 하지 않아도 되는 열린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억압이 없는 다양한 시민 결합들이 가능하기를 바란다. 우리 세대까지나 결혼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지, 앞으로 올 세대들은 혼란스러워하지도 않을 것이란 게 개인적인 전망이다. 제인 오스틴을 사랑하는 작가로서, 나는 사랑과 사랑 아닌 것들이 경계 없이 뒤섞여 있을 때 그것을 분리해보는 작업을 하고 싶다. 결혼에는 사회경제적 안정성, 속해 있는 집단의 압력, 원 가족과의 관계, 신체적 욕구 등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혼재해 있으니 말이다.

298p -

 

뮤지컬을 보고 나서 더더욱 자주 로알드 달의 말을 떠올린다.

친절함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한다. 용기나 대담함이나 너그러움이나 다른 무엇보다도 친절함이 말이다. 당신이 친절한 사람이라면, 그걸로 됐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달의 말을 어설프게 번역해보았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세상의 보고 싶지 않았던 면들을 보고 나서야 이 말이 의미 있게 와닿았다. 아동문학을 쓰고 싶었는데 다른 방향으로 와버렸지만, 세계에 대한 태도를 다시 다잡고 싶을 때는 역시 아동문학을 찾게 된다.

382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