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 도서관에서

제철 행복 - 김신지 에세이 -

아라모 2024. 7. 24. 16:16

가장 알맞은 시절에 건네는 스물네 번의 다정한 안부.

입춘  2월 4일 무렵. 봄이 일어서기 시작하는 한 해의 첫 번째 절기

내게 입절기는 늘 '배웅'과 '마중'의 시간이다. 입춘은 떠나는 겨울을 시간 들여 배웅하고, 다가오는 봄을 마중 나갈 때라고 알려준다. 미루다 놓친 겨울의 즐거움이 있다면 이참에 챙겨두라고 눈을 내려주기도 하고, 이른 꽃 소식을 통해 봄엔 어떤 즐거움들을 통과하고 싶은지 묻기도 하면서...           - 24P

희망은 어디 숨겨져 있어 찾아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하는 사람의 마음에 새것처럼 생겨나는 법이니까. 새싹을 틔우는 게 초목의 일이라면 희망을 튀우는 건 우리의 일.

다시 봄이다. 여기서부터 '진짜 시작'이라 힘주어 말해도 좋은~

우수(우수) 2월 19일 무렵  눈이 녹아 비가 되고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때

경칩  3월5일 무렵.  천둥소리에 놀라 겨울잠 자던 동물들이 깨어나는 봄

절기가 관찰과 기록의 결과물이라는 걸 새삼스레 깨닫는다. 벽에 걸어둘 시계도 달력도 없던 시절, 옛사람들이 눈앞에 보이는 자연의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계절의 흐름을 가늠했다는 게 잊혀가는 아름다운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52P
청소는 결국 빈자리를 만드는 일. 매년 이맘때 찾아오는 손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듯 바닥을 쓸고 닦고, 화분을 옮기고, 더 이상 쓰지 않는 물건을 나눈다.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지.....

춘분  3월 20일 무렵.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봄날. 

청명 4월 5일 무렵.  산과 들에 꽃이 피어나는 맑고 밝은 봄날

곡우 4월 20일. 곡식을 기르는 봄비가 내리는 때. 봄 산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 곡우엔 봄 산과 돌미나기전이 제철.

당연히 행복해지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어렵게 찾은 방법은 두 가지. 오늘의 일과와 의무 사이에서 '틈틈히' 행복해지기, 그리고 앞날에 행복해질 시간을 '미리' 비워두기, 틈틈이 행복해지는 건 영양제 먹듯이 챙기면 된다. 날씨 좋은 날 점심기간에 10분이라도 산책을 하고, 늦은 퇴근길에 맛있는 요리를 포장하면서 오늘의 기쁨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 행복해질 시간을 미리 비워두는 데는 약간의 성실함이 필요하다.        - 95P


입하  5월5일 무렵. 싱그러운 여름에 들어서는 출발선. 
'쪼~만하면 조팝, 이~(따)만 하면 이팝'

 
소만  5월 20일 무렵. 작은 것들이 점점 자라서 대지에 가득 차는 때. 소만엔 싱거운 안부가 제철. 먼저 건네면 무조건 좋은 것.

망종  6월 6일 무렵. 까끄라기 곡식인 보리를 베고 모를 심는 시기. 장마가 오기전에 해야 하는 일들. 망종엔 무얼 하든 바깥이 제철. 그러니 우리 모두 바깥 인간이 되자. 밖으로 나가 초여름을 누리자. 

하지  6월 21일 무렵. 여름에 이르러 낮이 가장 길어지는 날. 해가 지지 않고 우리는 지치지 않고...하지만 햇감자에 맥주가 제철.

소서  7월 7일 무렵. 작은 더위 속에 장마가 찾아오는 때. 비가 오면 달려가고 싶은 곳이 있나요. '비멍'이 제철.

대서  7월 22일 무렵.  큰 더위와 열대야가 이어지는 여름날. 대서엔 휴식의 자세가 제철.
여름이 이토록 더운 것은 우리에게 쉬어갈 명분을 만들어주려고. 무리하지 않는 법과 휴식의 자세를 가르쳐주려거. 무엇보다 쉬면서도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쉴 때 느껴야 하는 건 죄책감이 아니라 평온함임을 알려주려고.

입추  8월 7일 무렵. 가을의 길목에 들어서는 때. 구름 감상과 제비 관찰이 제철.

처서  8월 22일 무렵.  더위가 멈추며 가을이 깊어지는 때.  눅눅해진 마음도 햇볕에 잘 말리고서. 처서엔 포쇄가 제철.
한낮에 해를 보고 누었기에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답하기를 
나는 배 속의 책을 말리고 있소.  -- 송나라 유의경 <세실신어> 

백로  9월 7일 무렵. 밤 기온이 내려가 풀잎에 흰 이슬이 맺히는 시기. 도토리 6형제를 찾아 숲으로 ...

추분  9월 22일 무렵.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가을날. 이런 날엔 우리가 어디로든 가자 ~

한로 10월 8일 무렵. 찬 이슬이 맺히며 열매가 익는 시기. 계절이라는 가장 가까운 행복. 오래된 산책이 제철.

그러고 보면 제철 행복은 결국 '이때다 싶어' 하는 일들로 이루어진다. "요즘은 무화과가 제철이야. 이거 먹어보니까 맛있더라" 제철 과일을 챙겨 먹고 누군가에게 부쳐주는 일도, "이맘때 고창 선운사 꽃무릇이 그렇게 예쁘대, 보러 가자" 하면서 지금 가야 가장 근사한 풍경이 기다리는 곳에 함께 찾아가는 일도.혹은 더워서 , 추워서, 비가 와서, 눈이 와서 더 즐겁게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하는 것도 모두 제철 행복의 목록. 제철 행복 챙겼어? 하는 말이 언제까지라도 우리들의 다정한 안부 인사가 될 수 있기를 ...                           -  237P

부용지를 둘러싼 오랜 나무들은 그 풍경도 다 내려다보았겠지. 새삼 한 나라의 수도에 인왕산, 남산, 북한산처럼 등고하기 좋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것도, 도심 한가운데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궁이 여럿이란 사실도 드물고 귀한 일이란 걸 깨닫는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유산인지. 오를 수 있는 곳을 오르고 걸을 수 있는 곳을 걸으며 옛사람들의 발자국에 오늘의 발자국을 겹쳐보아야겠다                    -  243P

상강  10월 23일 무렵. 서리가 내리고 단풍이 짙어지는 때. 기차를 타고 가을의 마지막 역에 도착하는 일. 마지막 단풍놀이가 제철.

입동  11월7일 무렵. 겨울에 들어서며 겨울나기 채비를 하는 때.  긴 겨울을 함께 건널 준비를 하자~~

소설  11월 22일 무렵.  첫눈이 내리고 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시기.  별게 다 좋은 마음이 제철

대설  12월 7일 무렵. 큰 눈이 내려 보리를 포근하게 덮어주는 겨울날. 눈사람 순례가 제철~~.

"눈 온다!" 하늘에서 나풀나풀 떨어지기 시작한 눈송이를 발견한 순간, 우리는 온다고 말한다. "눈 내린다!" "눈이다" 하는 말보다 더 자주. 와야 할 이가 드디어 오는 것처럼.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 채로 기다린 사람처럼..

[사박 사박 장독에도 지붕에도 대나무에도 

걸어가는 내 머리 위에도...

잘 살았다. 잘 견뎠다.  사박사박.   - 윤금순 <눈> ]

전남 곡성의 시골 마을에서 시 쓰며 살아가는 할머니들을 그린 다큐멘터리 <시인할매> 의 시작이다. 한글 이름 석 자 제 손으로 적는게 소원이었던 할머니들은 모진 세월 다 견뎌내고 나서야 글을 배웠다. 관공서 서류에 또박또박 이름을 적게 되었을 때, 달력 뒷면에 문득 떠오른 기억을 적었더니 그것이 '시'라는 답을 들었을 때, 버스 옆구리에 적힌 행선지를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할머니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면, 화면 속에서 내리는 눈이 지난 세월에 대한 하염없는 대답 같다. 잘 살았다. 잘 견뎠다. 사박사박.     - 286P 

동지  12월 21일 무렵. 한겨울에 이르러 밤이 가장 길어지는 날. 긴긴밤, 돌아보면 좋은 순간들도 많았다고...

 

소한  1월 5일 무렵. 작은 추위 속 겨울 풍경이 선명해지는 때. 탐조와 겨울눈 관찰이 제철.

겨울만이 보여주는 풍경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겨울 숲을 걷는 걸음도 느려진다.. 잎이 다 떨어진 덤불 사이로 지난 계절에 쓰인 빈 둥지를 발견하기도 하고, 겨울에도 가지 끝에 새빨간 열매들이 달려 있어 새들의 귀한 먹이가 되어주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오솔길이 드러날 만큼 숲이 비었다는 건 나뭇가지 사이로 올려다보는 하늘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이야기 ...

대한 1월 20일 무렵.  큰 추위가 찾아오는 한 해의 마지막 절기. 

 자연스럽게 산다는 건 결국 계절의 흐름을 알고, 계절이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놓는지도 알고, '제때'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했던 옛사람들과 동식물처럼 사는 것.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하기로 되어 있는 흐름에 내 걸음을 맞추는 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하면, 불필요한 가지가 바람에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다. 꼭 필요치도 않는 것을 이것저것 매달고 여태 그것이 풍성함이라 여기며 살았던 건 아닐까. 내가 나로 살아가는 데 필여한 건 이거구나, 나머지는 결국 다 부수적인 것들이구나. 살아온 시간이 쌓인 만큼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선명해지면 좋을 텐테, 자주 잊고 새로 배우길 반복할 뿐이다.    -  33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