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 도서관에서

우울할 때 반짝 리스트 - 한수희 -

아라모 2021. 8. 17. 22:39

 

지옥에 떨어져서도 유머와 웃음만은 포기할 수 없는 여자, 한수희 작가의 신작 에세이『우울할 때 반짝 리스트』

 

엎드려 울고 싶을 때마다 내가 파고든 것들

이 책에 소개한 책과 영화들은 내가 인생의 돌부리에걸려 넘어지거나 진창에 빠졌을 때, 이유없는 우울함에 꼼짝도 할 수 없던 날에 파고들었던 리스트다. 그것들에서 내 인생의 결점과 모순, 아름다움과 탈출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세상 모든 것을 나를 중심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의 사랑이라는 건 상대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것에 가깝다.

그 나이쯤 하게 되는 첫사랑이 이루어질 확률이 낮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19p

사랑에 실패했는데 왜 연애가 아닌 심리에 관한 책을 고르는 걸까? 이제 우리는 사랑의 문제가 다른 모든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23p

 

하지만 만약 시간을 돌려 다시 사랑에 빠진다면 그때처럼은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최소한 사랑 앞에서 나를 약자 취급하지는 않고 싶다. 나를 존중하고 또 상대를 존중하겠다. 연애에서 여자가 맡아야 할 역할에 연연하지 않겠다. 그렇다고 그 역할에서 벗어나느라 깐깐하게 굴지도 않겠다. 입을 가리지 않고 큰 소리로 웃겠다. 타협하고 또 타협하겠다. 농담을 자주하고 장난을 많이 치겠다. 소소한 즐거움을 많이 누리려고 노력하겠다. 나에게 없는 것을 상대에게서 찾으려고 애쓰지 않겠다. 건강한 인간이 되겠다. 상대를 내 취향대로 바꾸려고 하지 않겠다. 27p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무섭고 위험한 로러코스터에 올라탔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

세상 모든 것들이 목적지를 향해 달려간다 해도 사랑에는 목적지가 없다는 사실을. 인간은 이렇게 애써 바보 같은 짓을 할 수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바로 그것이 우리가 연애를 해야 하는 이유라는 것을 39p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만큼이나 대책없는 질문이다.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연애의 구조에서 우리가 의식적인 통제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은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받을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선물로서 주어졌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알랭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49p

 

 

*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유머 감각이라는 건 자신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통찰에서 나온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몸과 인문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머의 기예를 터득한 이들은 결코 자신의 생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지독한 상황에서도 그 지독함에 휘둘리지 않고 생을 경쾌하게 변주한다.”

111p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 나를 짜증나게 하는 사람들, 나를 거절하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바닥으로 추락한다. 그러나 그 바닥에서 겨우 기어 나오면 우리는 아주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제 바닥이 어떤 곳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남의 감정을 헤아리고, 거리 두는 법을 배우게 된다. 상대를 질식시키지 않으면서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 줄 수 있는, 적절한 거리 말이다. 125p

 

의심은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의 시작이다. 나는 이렇게 뭔가를 의심 없이 확신하고 단언하는 사람을 도무지 못 믿겠다. 151p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 무엇이 됐든, 일은 자부심을 준다. 우리를 긴장하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겸손하게 하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경험하게 한다.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보게 해 준다. 시간 있을 때면 고개를 쳐들게 마련인 불안과 망상과 욕구불만 따위를 잊게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잊지 말아야한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일보다는 인생이다.

일의 바깥에도 삶이 있다. 직장을 그만둔다고 해서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이 일이 아니더라도 나는 여전히 나다.

일이 우리를 의심이 없는 괴물로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또는 자신이 만든 고치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그때가 비로소 잠시 멈춰 서서 의심해야 하는 때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의심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152p

 

 

말 걸기와 경청을 통해 비로소 남은 가 된다. 그의 고통에 찬 얼굴을 보고 고통이 벤 목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그를 외면할 수 없다. 나와 남 사이에는 거리만 있지만, 나와 너 사이에는 관계가 있다.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나는 너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고 다시 안녕을 서로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엄기호의 단속사회 중 - 160p

 

사람이 자신이 질서라고 믿는 한계 바깥에 더 큰 질서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낯선/모르는 것과의 만남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런 배움의 과정은 끊임없이 새로운 타자를 만나고, 그 타자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넓혀 가는 과정이다. 여기서의 원칙은 단 하나다. 내가 질서라고 알던 질서의 바깥에 무질서가 아닌 더 크고 아름다운 질서가 있다고 여기고 그 새로운 질서에 흥미를 가지는 것이다 -단속사회 중 163p

 

 

*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할까?

 

내가 진정으로 살아가고 싶은 모습은 엄기호가 말한 대로 내 옆의 사람 잘 돌보고 줏대 있게 내 삶을 사는 것이다. 유명해지거나 부자가 되는 것보다는 하루하루의 소박한 행복을 소중히 여기며 살고 싶다. 반고호도, 도스토엡스키도 필요 없다. 개미도 배짱이도 아닌 개짱이의 삶,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다 184p

 

 

*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배가 제대로 나아가지를 않아. 가려고 하는 방향에서 틀어져 버려...

노 젖는 방법이 틀린 건가?“

손 끝만 보지 말고 가고 싶은 곳을 보면서 저으면, 그곳에 다가갈 수 있어

- 마스다 미리의 주말엔 숲으로 중 -

다만 한 가지는 안다. 내가 원하는 삶이 남들이 사는 모습과 조금 다를지라도, 아주 작은 것부터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어느덧 내가 원하던 삶에 가까워져 있을 거라는 것, 결국엔 그곳에 다가갈 수 있을테니까

240p

 

달리기란 내가 속한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나는 그걸 육체의 지리학이라고 부른다. 달리기를 통해 나는 길의 생김새와 각도와 냄새를 경험한다. 달리기를 통해 나는 새들의 지저귐과 사람들의 안색과 바람의 느낌을 경험한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말로 설명하지 못하지만,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김연수의 지지 않는다는 말 중- 249p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 250p

 

중요한 것은 조리법이 아니다. 조리법을 따라 직접 만들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편하게 해 주면서 그게 뭐건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 정성스레 요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리하느라 초주검이 될 필요는 없다. 그냥 생긴 대로 자신의 삶에 어울리는 요리를 하면 된다.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 중

 

나이 드는 건 멋진 일이라고 찬양한다.

현명하고 슬기롭고 성숙한 인간이 되는 건 근사한 일이다. 인생에서 뭐가 중요한지 분별할 수 있는 시기에 이르렀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건 바로 내 목이었다 - 노라 에프런의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

 

<곽재구의 포구기행>에는 연륜은 사물의 핵심에 가장 빠르게 도달하는 길이라는 말이 나온다. 연륜을 잘 쌓은 사람들은 굳이 둘러가는 일 없이 본질을 꿰뚫는다. 그걸 속물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속물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과정에서 유머가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267p

 

칙칙해지지 말자.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자.

크게 소리 내어 웃어라. 먹고, 마시고, 흥겨워해라.

순간에 충실해라. 삶은 계속된다.

이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말을 되뇌어라

그렇다고 별 수 있나?’ 여기,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다

-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 -

 

글을 쓰다 보면 처음에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출구로 나올 때가 많다. 원래 나는 ‘A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는데 다 쓸 때쯤엔 “B라고 생각하는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A라고 생각하는사람이라고 믿었는데, 쓰다 보니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하고, 그래서 자신을 설득하려고 보면 어느새 ‘B라고 생각하는사람이라는 것을 깨닥게 되는 과정이 글쓰기인지도 모르겠다.

- 에필로그 작가의 말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