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함보다 더 큰 힘이 어디 있으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인생과 종교 그리고 처세의 아포리즘-
어릿광대 난장이의 기도
저는 색깔을 물들인 옷을 입고 공중제비 재주를 바치며 태평을 즐기면 부족함이 없는 어릿광대입니다. 제발 제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제발 쌀 한 톨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해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제발 곰발바닥 요리마저 싫어질 정도로 부유해지게도 하지 말아주십시오.
제발 뽕잎을 따는 시골여자조차 싫어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제발 후궁의 미인마저 사랑하게 하지도 말아주십시오.
제발 콩과 보리도 구별 못할 정도로 어리석게 하지도 말아주십시오. 제발 하늘을 떠도는 기운을 살필 정도로 총명하게도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 중에서도 제발 용감한 영웅이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저는 지금 어쩌면 오르기 힘든 산봉우리의 꼭대기를 오르며 넘기 어려운 바다의 파도를 건너며- 말하자면 불가능을 가능으로 꿈꾸는 것입니다. 그런 꿈을 꾸고 있을 때만큼 두려운 적은 없습니다. 저는 용과 싸우듯이 이 꿈과 싸우는 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제발 영웅이 되지 않게- 영웅의 뜻을 세우지 않도록 힘없는 저를 지켜주십시오.
저는 이 봄날 술에 취해 이 청춘의 노래를 부르며 이렇게 좋은 날을 기뻐하면 부족함이 없는 난쟁이입니다. -21p-
예술 감상은 예술가 자신과 감상하는 사람의 협력이다. 말하자면 감상하는 사람은 한 작품을 과제로 그 자신의 창작을 시도해보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까닭에 어떤 시대에도 명성을 잃지 않은 작품은, 반드시 여러 가지 감상을 가능하게 하는 특색이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감상이 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나톨 프랑스가 말한 대로, 어딘가 모호하기 때문에, 어떠한 해석을 내리기에도 쉽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여산의 봉우리처럼, 여러 처지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다면성을 갖춘 것이다.
-33p 감상 -
연애가 죽음을 연상하게 하는 점은 진화론적인 근거가 있는지도 모른다. 거미나 벌은 교미가 끝나면 바로 수컷은 암컷에게 죽게 된다. 나는 이탈리아 순회배우가 가극 ‘카르멘’을 연기하는 것을 보았을 때, 아무리 생각해도 카르멘의 일거일동에서 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107p 연애와 죽음 -
건전한 이성은 명령한다. -“그대여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마라”
그러나 건전한 본능은 전혀 반대로 명령한다. -“그대는 여인을 피하지 말라.”
여인이 우리 남자에겐 바로 인생 그 자체이다. 이를테면 모든 악의 근원이다.
- 117p 여인 -
기독교는 예수 자신도 실행할 수 없었던 역설이 많은 시적인 종교다. 그는 그의 천재성 때문에 인생마저 웃으며 내던져버렸다. 오스카 와일드가 그에게서 낭만주의의 제일인자를 발견한 것은 당연했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은 바람에 날리는 백합꽃 한 송이보다 못했었다. 그의 길은 다만 시적인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생활하라는 가르침에 있다. 무엇을 위하여?- 그것은 물론 유대인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어떠한 천국도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고선 들어갈 방도가 없다.
비누냄새 나는 장미꽃으로 가득한 기독교의 천국은 어느새 공중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대신 천국 몇 개를 만들어냈다. 예수는 우리에게 천국에 대한 실망을 불러 일으켰던 제일인자였다. 더욱이 그의 역설은 후대의 무수한 신학자와 신비주의자를 만들어냈다. 그들의의논은 예수를 어리둥절하게 했으리라. 그러나 그들 중의 어떤 사람은 예수보다 더욱 기독교적이었다. 예수는 어쨌든 우리에게 현세 저편에 있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 속에서 우리가 찾는 것을 - 우리를 영원의 길로 들어가게 하는 나팔소리를 느낀다. 동시에 언제나 예수 속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책망하는 것을 - 근대가 겨우 표현한 세계의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164p 기독교도 -
예수는 모든 예수들처럼 공산주의 정신을 갖고 있다. 만약 공산주의자의 눈으로 본다면 예수의 말은 모두 공산주의 선언으로 바뀌리라. 그보다 앞선 요한마저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주라’고 외쳤다. 그러나 예수는 무정부주의가 아니다. 우리들은 그의 앞에서 자연히 본체를 드러낸다. (다만 그는 우리 인간들을 조종할 수 없었다- 또는 우리 인간들에게 조정당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요셉이 아닌 성령의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었던 공산주의자를 논하는 일은 스위스로부터 멀리 떨어진 일본에선 적어도 불편을 수반한다. 적어도 기독교교도들을 위해서. - 197p 공산주의자 -
예수는 아주 빠른 생활인이다. 부처는 득도를 하기 위해서 몇 년 동산 설산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예수는 세례를 받고 사십일 단식을 한 후 바로 고대의 저널리스트가 되었다. 그는 스스로 완전히 다 태워버리려는 한 자루의 양초와 똑같다. 그가 행했던 ㅇ일들과 저널리즘은 바로 이 양초의 촛농이었다. - 199p 생활인 -
예수는 비유를 말한 뒤 ‘어째서 너희는 아직도 알지 못하느냐?’ 고 말했다 이 탄성도 또한 자주 반복되었다. 그 질문은 그가 우리 인간을 알고 줄곧 보헤미안적인 생활을 했던 사실에 비워볼 때 어쩌면 우스꽝스럽게 보였으리라. 그러나 그는 히스테릭하게 때때로 이렇게 절규했다. 바보들은 그를 죽인 뒤 세상에 거대한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교회에서 또한 그의 탄성을 느끼리라. ‘어째서 너희는 아직도 알지 못하느냐?’ -그것은 예수 혼자만의 탄성이 아니다. 후대에 비참하게 죽어간 모든 예수들의 탄성이다.
- 212p 예수의 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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