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을 것을 알면서도
눈사람을 만드는 그 마음에 대하여.
사라진 것들은 불쑥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차가운 커피를 좋아하는지 뜨거운 커피를 좋아하는지 낱낱이 기억할 여력은 없을지도 모른다
차가운 커피와 뜨거운 커피 따위가 도무지 뭐가 중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무엇이 치명적인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 것인가를 누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나는 요즘 꽤 자주, 그 사소한, 커피의 온도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마다 혀끝의 온도가 다 다르다는 것에 대해, 한 사람을 순식간에 무장해제시키고 위안을 주는 온도가 제작각이라면,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나 말고 단 한 사람쯤은 나만의 온도를 기억해 주면 좋겠다고....
사랑에 대해, 사람에 대해, 여전히 잘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상대에게서 '무슨 말을 듣든 다 괜찮다고 또 다시' 말할 거라면, 다시 시작하지 말라고.
괜찮을 땐 괜찮다는 말을, 괜찮지 않을 땐 괜찮지 않다는 말을 , 여하튼 언제나 당신의 진심을 말하라고.
서로에게 관여하지 않는 '좋은 관계'란 어디에도 없으니 말이다.
- 44p 괜찮다는 말, 괜찮지 않다는 말 中에서 -
상대방이 싫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그 옆의 내가 싫어서 도망치는 경우도 있다.
그 사람 옆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고 어색할 때, 혹은 그 모습이 스스로도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변해갈 때 우리는
이별을 결심한다.
일상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곤 하는 습관이 새로 생겼다고해서, 일 년 후의 삶이 까마득한 암흑처럼 느껴진다고 해서, 그게 모두 '그 사람과의 관계' 탓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내 탓'이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과는 이별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방과 이별한다. 가장 가까운 옆 사람과 헤어지면 내가 조금은 다른 샮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 93p 지상의 유일한 방 中에서 -
결혼이란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생활 속으로 돌입한다는 뜻이다. 그 안에서 범속한 일상들이 끝없이 되풀이된다.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 생활비를 벌어야하고, 공동의 아이를 양육해야 한다. 그 세월의 더께 속에서,
실은 두 사람이 최초에 무척 특별한 감정으로 맺어졌던 관계임을 상기할 여력은 사라진다.
욕실의 타일 줄눈이 더러워지는 것처럼, 어떤 일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주 서서히 일어난다.
삶의 무게가 두 사람의 어깨에 고르게 배분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때론 내 어깨가 무겁다는 것보다 저 사람의 어깨가 나보다 가벼워 보인다는 사실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하루하루 살아가느라,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차가운 커피를 좋아하는지 뜨거운 커피를 좋아하는지 낱낱이 기억할 여력은
없을지도 모른다. 차가운 커피와 뜨거운 커피 따위가 두무지 뭐가 중요하냐고 물을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무엇이 치명적인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 것인가를 누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 125p 커피 두 잔 中에서 -
차마 소설이 내 모든 것이라 말하지 못하고 여전히 어둠이 무섭지만, 그래도 소설을 쓴다.
안 될 것 같은데, 도저히 안 될 것 같은데, 조금씩 조금씩 '안되지 않는' 찰나들이 모여 한 편의 소설이 완성된다.
이것이 '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다시는 못 쓸 것 같은 시간이 있었고, 간신히 지나갔고, 또 다시 찾아오리라는 것만은 안다.
언젠가 완벽한 검은색 날개를 가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생기지 않는다. 어떻게도 벗어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이 없다.
용기를 쥐어짜 책상 앞에 가 앉는 수밖에. 희미한 손전등 불빛에 의지하여 나는 조심조심 날아간다.
- 141p 어둠을 무서워하는 꼬마 박쥐에 관하여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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