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백을 사랑하는 일에 대하여.
잊고 살던 것을 생각할 시간이. 매일을 누릴 시간이.
마음을 돌볼 시간이. 그리고
더 사랑할 시간이.......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마음에도 방이 있고 책상이 있어서 그 책상 앞에 한 시절의 메모를 붙여두고 산다면,
지난 몇 년간 내 마음의 벽에 붙어 있던 단 한 장의 메모는 이것이었다.
그 무렵 나에겐 정말 시간이 없었다.
하루가 24시간으로 이루어진건 8시간 잠자고, 8시간 일하고, 8시간은 삶을 누리라는 뜻이라고 농담하던 나는 진작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 시간을 팔어서 번 돈으로
다시 시간을 사길 반복했다.
돈을 벌어서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내가 원하는 시간을 보내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느라, 정작 내게 소중한 것들을 자꾸 뒤로 밀쳐두어야 했다. 바빠서 나빠지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나는 그때 분명 나빠지고 있었다.
열심히 살수록 내 삶에는 소홀해지고 있었으므로.
- 6p 작가의말 중에서 -
하지만 만에 하나 누군가 내게 글쓰기를 어디서 배웠느냐고, 당신에게도 ' 문학적 토양' 같은 게
있느냐고 묻는 날이 온다면, 밭두렁에서 콩알처럼 와르르 쏟아져 내려오던 그 얼굴들을 떠올릴 것 같다.
학자가 되었어야 했던 한 사람의 얼굴과, 잘못 산 책을 든 채로 축하 인사를 준비한 사람의 얼굴도. 손때 묻은 봉투 속 십시일반으로 모은 꼬깃꼬깃한 지폐들도.
문학이 뭔지도 정확히 몰라도, 쓰고 싶어지게 만드는 장면들을 안다고.
그 앞에서 나는 항상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한 채 허둥거리다가 돌아서서 웃거나 울지만. 제때 하지 못한 말들이 모여서 나를 책상 앞으로 이끈다고.
여태까지 내게 흰 봉투를 건넸던 다정하고 결함 많고 고유하게 평범한 이들에게 언젠가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같은 사람들'과는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곳에 제자리처럼 깃드는 것.
그게 내가 아는 문학이라고.
- 47p 쓰게하는 장면들 중 -
오늘 내가 존재함에 감사
오늘 내가 건강함에 감사
오늘 내가 일할 수 있음을 감사
오늘 내가 누군가를 만남에 감사
오늘 감사할 조건을 찾으면 너무 많다
다른 데서 봤더라면 뻔하다고 여기고 지나쳤을 말들이 인숙 씨 일기장에 있으면 달리 읽힌다. 맞지. 그렇지.
오늘 내가 일할 수 있고, 몸이 건강하고,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건 분명 감사할 일이지. 파란 글씨로 쓰인 저 문장들이, 실은 인숙씨가 삶을 펜처럼 잡고서 적어낸 문장이라는
걸 안다. 그러니까 그건 머리로 글을 쓰는 내게 얼마나 요원한 일인지.
삶 전체를 밀고 나가면서 한 글자, 한 글자 적는다는 것은.
......................
그날 밤 세수를 하면서도, 자려고 누워서도 그 문장이 마음에서 내내 떠나지 않았던 걸 기억한다.
아마도 내가 인숙 씨 일기에서 매번 느끼는 것, 그래서 인숙 씨에게 되돌려주고 싶은 말을 닮아서 그랬을 것이다.
'인생이란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답할 수 있을까.'
이 문장이 전부였던 어느 날의 일기에 이미 그렇게 사셨다고, 지금 선 자리가 당신이 최선을 다한 자리라고 대답하고 싶어서
- 81.84p 지금 선 자리가 최선을 다한 자리 중 -
휴식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는 쉼과 멍이 이음동의어 같다.
멍의 순간에는 어떤 조급함도 끼어들 틈이 없다. 느린 호흡과 느린 시선과 느린 마음으로만
이루어진 세계. 그 안에서 나는 호두과자 속 팥 앙금에 감싸인 호두 같은, 완두콩 꼬투리 속 4번 콩 같은 아늑함을 느낀다.
이 세계가 나를 감싸고 있다고, 내가 할 일은 이대로 '존재'하는 것밖에 없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
하나의 풍경을 오래 바라볼 줄 아는 사람.
그 시간이 지루하지도 무용하지도 않다고 여기는 사람.
늘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나는 미래에 있는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미 같이 있었다는 사실. 너무 많은 것들이 그 위로 쌓이고 덮여서 보지 못하다가 이제야 젖은 낙엽을 들춰내 찾아낸 듯한 기분. 거기 있었구나
- 109. 112p '멍문가'의 작은 세계 중 -
시간이 생기면? 하루를 어떻게 쓰고 싶어?
그런 물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덜 쓴 희망을 발견한 사람처럼 조용히 기뻐졌다.
누군들 '사는 것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없을까.
그게 어떤 상태를 뜻하는지 명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우리는 늘 꿈꾼다.
지금 이 삶으로는 부족하다고. 기대감에 눈 뜨고 만족감에 잠드는 하루가 내게도 가능해진다면,
그 삶은 얼마나 애틋할까. 나를 써야 할 바로 그곳에 제대로 쓰고 있다는 느낌, 내가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있다는 느낌은 얼마나 충만한 기쁨일까.
- 155p 오늘 하루가 다 내 것이었으면 중 -
예전에 '시간 되면 꼭 해야지'라고 적던, 언젠가 하고 싶은 일들의 목록들을 지금은 '시간 내서 해야지'라고 적는다. '시간되면'과 '시간 내서' 사이의 작은 차이를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시간을 내지 않으면 그럴 시간은 영영 오지 않는다는 걸. 그럴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말하는 세상을 행해 반복적으로 그럴 시간이 여기 있다고 대꾸해야 한다는 걸.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싶어지는 순간마다
마음을 바꿔 먹어본다. 내가 지금 이럴 때가.... 맞는데 하고.
그럴 때만이 비로소 시간은 내 편이 되어준다는 것도 안다.
퇴킷리스트는 1번을 지운 것으로 됐다. 앞으로도 '시간 내서 하고 싶은 일들'의 목록이, 시시하고 아름다운 일들이, 끊임없을 것을 생각하면 걸음이 느려진다. 삶에는 결승선 테이프 같은 건 없으니 조금 돌아가더라도
좋아하는 길로 걷고 싶다.
그렇게 걷는 동안 무얼 봤는지 얘기하고, 때로는 글로 옮기고, 어떤 장면은 끝까지 혼자서만 간직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세 섬에서 주워온 장면들이 그렇듯이.
나는 이제 사는 데 시간을 쓰기로 했다.
이 말을 하게 되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 188p 나만의 퇴킷 리스트 중
삶에서 무언가가 올 때 좋은 것만 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만큼 나이가 들었다.
체에 거르듯이 좋은 것만 취할 수는 없다. 어떤 것을 얻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다른 것에 대해 늘 생각한다.
맥주의 즐거움은 뱃살과 함께 받아들여야 하고(안받아 들이려면 유산소 운동 한 시간 추가), 글을 쓰기 위해선 늘 일정량의 괴로움을 받아들여야 한다.
.............
아이러니하게도 글쓰기의 좋은 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 충분해서가 아니라 부족해서, 잘해서가 아니라
못해서 계속할 수 있다는 것. 나아지려고 계속보는 세계. 잘 쓰려고 애쓰는 세계. '아는 기쁨'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어서 열 번의 '아는 실망'도 견디는 세계.
쓰지 않은 글보다 명백히 별로인 글을 어떻게 하면 나아지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혼자서 수없이 문장을 덜거나 더하고 위치를 바꿔보고 그러다 통째로 지우고 다시 쓰기도 하는 세계.
하다가 그만두고 싶어지는 일이 아니라 계속 더 해보고 싶은 일을 만난 건 다행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나의 부족함이 이 세계에선 계속할 수 있는 동력이 된다는 사실도.
- 217p 부족해서 계속되는 세계 중
일상이 사라진 것만 같은 자리에도, 기억하고 기록할 만한 순간이 분명 있었다.
내가 어떤 순간들로 지탱되는 사람인지도 알게 되었다. 그런 한편으로 한 번뿐인 이 삶이 '무엇으로 충분한 삶인지' 깨닫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마스크 없이 웃었으면, 친구들과 모일 수 있었으면, 가족들을 더 자주
봤으면..........
바라는 건 그만큼인데 그만큼이 어려울 때, 삶은 단출해진다.
사실 더 많은 것은 필요치 않았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훗날 누군가 그때가 어땠느냐 묻는다면 말하고 싶다. 일상을 잃었지만 동시에 일상을 되찾았던 시간이라고.
'코로나 시대를 건너는 지혜'에 대해 원고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이런 글을 써서 보낸 적 있다.
'당연했던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낀 3년을 보내면서 내가 바란 것은 일상, 오직 일상의 회복이었다. 일상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이 있다는 듯 다른 무언가를 좇으며 살아왔지만, 그 기간 동안
우리의 간절함은 아마 한곳을 가리켰으리라. 동시에 좁아진 삶의 반경 안에서 내 곁에 원래도 있었지만 이제야 발견하게 된 듯한 아름다움들을 자주 들여다보았다.
...................
어렵게 배운 것을 쉽게 잊게 될까 봐서, 간절했던 마음이 과거가 되면 어느새 또 이 일상이 당연해질까 봐서,
그게 인간의 어리석음인 걸 알아서 자꾸 적어둔다. 오늘 내 앞에 도착한 아름다움을 보자고.
창 아래서 이어지는 성실함을 따라서 살자고.
잃어버렸다 되찾은 것을 오래 지킬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잃었던 순간의 간절함을 잊지 않는 것. 그 간절함으로,
눌러 쓴 글씨처럼 또박또박 사는 것.
- 253.255p 오늘이란 계절 속에 있는 것들 중 -
망할까 봐 두려워 아무 선택도 하지 않거나, 생각대로 되지 않은 일을 스스로 '실패'라 부르는 대신,
계속해 보고 싶다.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줄 좋은 실패, 실은 좋은 경험을.
그럼에도 좌절에서 빠져나오기 힘들 땐 '열린 결말'이라 생각해 보기로.
이 경험이 나를 어떤 길로 이끌어갈지, 어디까지 데려갈지 지켜보는 마음으로 걷고 싶다. 덜 낙담하면서 더 씩씩하게.
결말이 정해지지 않은 한 편의 이야기 속을.
- 아직 오지않은 시간에게 -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 파스칼 메르시어<리스본행 야간열차>중에서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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