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 도서관에서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 이도우 -

아라모 2022. 6. 15. 15:43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 이도우 산문집 -

 

"내일 또 하루치의 고단함과 기쁨, 슬픔이 찾아오겠지만

지금 이순간은 서로에게 잘 자라고 인사하기로 해요.“

소설가 이도우의 오래도록 기억되는

쓸쓸하고 아름다운 풍경들에 관한 이야기.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는 게시판에 1년에 두어 번 혼자 들어가 볼 때가 있다.

버려진 것처럼 남겨진 제목들을 눌러 물끄러미 읽으며 비로소 깨닫는다.

쓸쓸함은 기록되어야 한다고.

기록하지 않은 날이 기록한 날보다는 훨씬 많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렇다면 그 많은 날은 쓸쓸하지 않았던 날들이니까.

미처 쓸쓸할 새도 없이 살아낸 비어 있는 날짜들을 기억해 주기로 한다

기록하지 않았던 이름표 없는 보통의 날들. 여리고 풋풋했던, 인생이 평탄하고 버드나무 말고는 아무도 눈물짓지 않았던, 베개 옆에 꿈이 있어 고마웠던 그날들을 .

-23p -

 

이튿날 날이 밝자 마을은 얼마나 눈부시게 환하고 아름답던지. 군데군데 얼음이 언 냇물은 뼈가 시리게 차가웠고, 논 밭 사이 엎드린 집들과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 어젯밤 그렇게 불안하게 짚어온 마을이 맞나 싶을 만큼 전혀 다른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때 햇빛 아래서 역사가 되고, 달빛 아래서 전설이 된다는 명언이 온전히 이해되었다 .

어떤 장소에 밤에 도착하는 것과 낮에 도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여행의 시작이라는 사실도.

- 26p -

 

오늘의 부피가 한 사람에게 포개지는 날짜의 순환이라면, 그날 다들 어디 있었을까 하는 질문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어떤 부피를 쌓아간다고 생각하면,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이번 생이 조금은 덜 외롭다. - 76p -

 

슬픔이 녹는 속도는 저마다 달라서.......

빨리 울지 않는다고 이상하다 생각 말아요.큰 슬픔이 녹기까진 더 오래 걸리니까.

가장 늦게까지 우는 이유예요.

 

노먼 형제는 아버지로부터 플라이 낚시를 배웠다. 낚시를 모르는 사람이 물고기를 잡는 것은 물고기를 조롱하는 것이므로, 강가에서서 낚싯줄을 날릴 때 네 박자 리듬을 신중하게 지켜야 한다고. 열 시와 두 시 방향 사이에 라인을 힘차게 날리되 그 탄성으로 수면에 부드럽게 사뿐히 내려앉게 하라고. 그렇게 조절하는 힘은 아무 데서나 나오지 않고,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지 아는 지식에서 나온다고 그들의 아버지는 말했다. 그건 어쩌면 일종의 금욕이나 절제에 관한 이야기였으리라

넘치지 말라는 것. 한번 쓴 작문 숙제를 줄이고 또 줄이게 하는 훈련도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글쓰기를 이번 생의 업으로 삼았으니 나 역시 내가 쓰는 글의 보폭과 리듬을 고민하게 된다

그럴 때는 아름답고 푸르던 영화 속 몬태나 숲의 강물과 그들이 나란히 서서 날리던 플라이 낚시의 네 박자 리듬을 생각한다. 그게 무엇인지, 그 박자와 호흡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도 다 알지 못하지만, 글과 더불어 살아갈수록 더 아껴서 말해야 한다는 두려움도 찾아온다.

부드럽게 사뿐히 수면에 내려앉는 라인처럼, 은유하자면 네 박자 리듬의 글쓰기이고 그건 어쩔 수 없는 희망이다.

같은 밀도의 이야기를 할 때도 가능한 한 소박하고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기를. 관장하지 않고 진솔할 수 있기를. 그저 첫 마음을 잃지 않기를. -185~186p -

 

그래서 나는 소설 속의 인물 은섭에게 이 말을 주고 싶었나 보다.

그 말 그대로야. 항상 너한테는.”

은섭이 사랑하는 해원은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많은 이였다. 해원은 겨울밤 뒷산 오두막으로 그를 찾으러 가다가 길을 잃는데, 은섭이 그녀를 찾아서 함께 산을 내려가려 하자 순간 오해한다, 그녀가 오두막에 가는 게 싫어서 그런 거냐고. 그의 공간에 들여놓지 않으려는 것 같다고. 은섭은 해원을 감싸며 말한다. 지금 오두막은 춥고, 그게 유일한 이유라고. 그 말에 다른 뜻은 없다고

은섭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캐릭터여서 고마웠다. 이 대사를 쓰고 싶어 두 사람이 숲의 오두막에서 함께 밤을 보내는 어쩌면 로맨틱할지도 모를 설정을 포기했다. 하룻밤 더 같이 있지 못하더도 그 말 그대로야라는 말을 해원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애정이 있는 가까운 이들에겐 언제나 그 말 그대로, 어떤 함의나 간접적인 가시가 없는 담백한 언어를 건네고 싶다.

숨은 뜻을 요령 있게 내비치는 이들이 복잡한 내면을 가진 듯 멋있게 느껴지던 시절도 있었고, 함의와 행간은 여전히 흥미로운 문학적 텍스트이지만, 그것이 일상을 잠식하게 두고 싶지는 않다. 살아갈수록 그 말 그대로, 그 마음 그대로인 이들이 곁에 남는다. 나도 그들에게 그런 사람이고 싶다. - 294p -

 

어른이 되고부터는 사람을 사귀는 일이 쉽고도 어려워졌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는 사회인의 모습이지만, 그 후로 서로가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지는지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으니까. 사람들 사이에 울타리가 있다는 것만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런 어른의 관계가 싫은가? 하고 물으면 바로 대답이 나오진 않는다. 서로가 타인으로 살아가며 지키고 받아들여야 할 자연스러운 자세인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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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다가가는 걸음의 속도와 보폭이 다르다. 둘이 마주 보고 열 발자국씩 가까워지자 약속해도, 막상 열 걸음 걸은 뒤 재보면 서로 똑같은 거리만큼 다가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더 넓은 보폭으로 다가간 이가 좁은 걸음으로 다가온 이에게 서운해하거나 우정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저마다 할 수 있는 보폭과 속도로 열 걸음을 걸었으면 된 게 아닐까. 그건 그 인물이 가진 재질이기에. - 321p -

 

인생은 지는 게임이라고 평소 생각해왔습니다. 기왕이면 잘 지는 게임, 아름답게 지는 게임이라고. 살아가는 건 마침내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닌 것 같아요.

결국 꿈을 이루려고도 아니고. 그저 순간 속에 있기 위해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반짝이는 한순간, 보석같이 소중하고 귀한 순간과 가끔 조우해 그 속에 잠시 눈을 감고 있으려고요. 마치 민들레가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상상해보듯이, 꿈꾸던 것들이 손에 잡히지 않고 다만 손등을 스쳐가는 걸 느껴보려고.

그렇게 인생에 잘 지고 돌아온 이들이 모여 따뜻한 티파티를 하고 싶습니다.

등나무 덩굴이 자라는 어느 집 마당이면 좋겠습니다. 그 집은 아마도 길눈이 어두운 사람들이 찾기 쉬운 곳일 거예요. 나뭇가지나 고장 난 트럭을 랜드마크 삼아 걷다가 뜻밖에 어느 골목에서 찾게 되겠지요. -324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