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인생의 '주인'이 되는 길을 찾다
세 사람만 모이면 단체나 위원회를 만드는 이들이 원하는 것이 처음에는 약자의 생존법인줄 알았다.
그들이 집단의 힘과 보호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다음에는 감정을 신진대사시켜 줄 공간을 필요로 하는 거라 생각했다. 혼자 소화시키지 못하는 감정을 안전하게 토로할 곳을 원하는 듯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모임을 만드는 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성장과 변화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경험을 나눔으로써 서로에게 중간 공간과 촉진환경이 되어 주고 있었다.
정신 건강의 핵심은 양가성 통합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 개인 내면에서 사랑과 미움, 분노와 용서 등 양가적 감종들을 통합하고 수영하면 그만큼 관대하고 평온한 마음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런 다음 관계 맺는 타인들과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 문화와도 양가성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과 속의 통합, 삶과 죽음의 통합까지 다섯 단뎨에 걸쳐 양가성 통합을 이루어내면 영적 건강의 차원에까지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관점을 바꾸자 상대에게서 보이는 모든 감정이나 성향이 나의 내면에서 발견되었다.
상대의 잘못에 대해 격한 감정이 올라올 때도 그것은 '나의 분노'였고, 정당하게 비판한다고
느꼈던 목소리 안에도 '나의 시기심'이 있었다.
갈등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사람을 만나서 무슨 말을 하는지를 자각할 때마다 그곳에 환하게
나의 내면이 드러나곤 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 행위를 멈추고, 그 다음에 밀려오는 부그러움을 가만히 느껴 보곤 했다.
그즈음에야 비로소 '자기를 본다'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감정적 반응, 특정 상황에 대응하는 나의 행동들을 보는 것이 진짜
자기를 보는 일이었다.
그것은 외부로 투사한 감정을 끌어안는 첫 단계이기도 했다.
"상대방에게서 느껴지는 불편은 나의 모습이다."
내면에 간직해 둔 부모 이미지를 떠나보내자 비로소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애착과 미음의 감정에는 근거가 없으며, 나의 존재를 타인에게 증명할 이유가 없으며,
누군가에게 승인받을 필요가 없었다.
훈습 기간 중 어느날, 비로소 '어른'의 개념을 이해할 것 같았다.
사실 오래도록 '어른'이라는 단어에 너무 많은 환상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생물학적 성인의 나이가 되었을 때 알아차린 한 가지 사실은 '어른도 참 별것 아니구나.' 하는 거였다.
어른이 되면 마음이 넓어지고, 세상이 환히 이해되고, 매사에 지혜로운 판단을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생물학적 성인이 되어도 그런 곳에 도달하지 못했고, 주변 사람들도 나와 비슷해 보였다.
'어른이라는 단어는 환상이었구나. 화장품이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을 끼워 팔고, 약품이 건강에 대한
환상을 끼워 팔듯이, 어른이라는 단어에도 환상의 가치가 덧입혀져 유통되는구나'
나중에야현대 사회의 공동체 해체, 양육 환경변화, 성인식 실종 등이 우리를 미숙아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신분석 언어로는 누구에게나 '내면의 아이'가 있다고 했다.
전통 문학과의 단절, 선조들의 지혜와 단절되는 일이 우리가 어른이 되지 못하게 된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음을 짐작하게 되었다.
영웅 신화의 주인공들은 오래전부터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일러 주고 있었다.
스스로 비전을 세우고, 주도적으로 삶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를 통해 보여 주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되면, 그 자리가 모두 진리이다 ."는 <임제록>의 한구절이다.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되는 고,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이해한 어른의 의미였다,
"모르과 혼돈 상태에 머물 때에야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신비로운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말은 정신분석가의 정의 이전부터 이미 있어 왔다. 다만 내가 알아 듣지 못했을 뿐이었다. 사찰 일주문에는 "이 문으로 들어오는 자,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라."라고 씌어 있다.
성경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위(하늘)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불경에서 말하는 '반야 지혜'와 성경의 '위에서 오는 지혜'가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인간이 불안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 가진 지식과 닫르다는 것은 알 것 같았다,노자도 그렇게 말했다.
"크게 지혜로운 사람은 마치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단순과 천진'은 젊은 날부터 마음에 품고 거듭 확인해 온 가치였다. 이십 대 때 내 직업은 대중들이 관심을
갖는 사건이나 사람을 취재하여 글로 옮기는 일이었다. 당시 만났던 이들은 저마다 자기 분야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확립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그들이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가리지 않았을 것이고, 능수능란하고 노련한 방법으로 욕구를 충족시켜 왔을거라 생각했다.
사실은 그 반대였다. 자기 분야에서 개성과 전문성을 확립한 이들을 만날때마다 그들이 놀랍도록 순수하고, 아이처럼 순진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당황했다. 처음 한두번은 예외일 거라 생각했다. '이미 그 자리를 차지했으니 얼마든지 여유롭고 순진해도 되겠지.' 싶었다.
'예술가나 지식인들만 순진하겠지, 전문 경영자들은 노회할 거야.' 생각하기도 했다.
전문 경영인을 만났을 때는 그런 생각도 오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 시절, 그들을 보면서 천진과 단순이 강한 추진력이고 지혜에 이르는 길임을 짐작했을 것이다.
"궤변과 계략만 아니라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노자 말씀에 밑줄 그을 때는 단순과 천진이 도덕성과도 연결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때는 막연히 짐작했던 특성들이 알고 보니 헤파이스토스와 같은 성향이기도 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묘비명'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세 문장으로 된 묘비명을 접하는 순간, 거대한 수수께끼와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저 단순한 문장에는 틀림없이 깊고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읽은 카잔차키스의 글은 인간의 깊이뿐 아니라 우주의
넓이까지 담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묘비명도 표면적인 의미가 전부가 아닐 거라 믿었다.
버릇처럼 묘비명을 중얼거린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그 의미가 환하게 밝아 오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의존성, 결핍감, 시기심, 자동 강박 반복 추구와 관련되어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불안, 분노,공포, 방어기제 등의 감정과 관련 있었다.
'나는 자유다.'는 인정 지지 욕망, 존재 증명 시도, 내면의 감독관 등과 관련된 문장이었다.
세 범주의 감정들은 인간이 고통받는 내면의 모든 요소를 포괄하고 있었고, 유아기에 잘못 만들어 가진 생존법과 관련 있었다.
놀라운 느낌과 함께,내가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한 게 아닌가 하는 염려와 함께 잠시 숨을 멈추고 있었다.
특히 '나는 자유다'라는 문장이 놀라웠다. 앞의 두 문장을 정신분석 학문 내에서 자주 사용되는 언어들이지만'자유'는 처음이었다. 가만히 서 있었더니 생각이 더 자라났다.
그의 묘비명이 불교에서 말하는 탐진치 삼독이나 기독교에서 규정한 일곱 가지 악이 해결된 지점과도 같은게 아닐까 싶었다.
일곱 가지 악 중 색욕,식욕,탐욕,시기심은 탐심,분노는 진심, 나태와 교만은 치심의 범주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탐심이,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진심이, '나는 자유다,'는 치심이 제거된 상태를 지칭하는 듯 했다.
생각 중에 너무 놀라서 잠시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역시 카잔차키스였다.
천국이나 열반이 심리 상태에 대한 은유라면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은 바로 그 지점을 가리키는 게 틀림 없었다.
정신분석학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도 같은 곳이었다.
존 브래드쇼는 '개인은 자기 안에 온 가족을 지니고 있다'는 명제의 가족 체계 이론을 제시하는 심리학자이다.
그의 책 < 가족 >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가족 지도를 처음 그렸을 때 나는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해 위로받았다. 처음으로 나의 내면에 아 자신이나 가족 구성원 중 한사람보다 훨씬 큰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러 세대 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상처와 고통을 내가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지만 어느누구도 비난받아서는 안된다.'
어렸을 때는 의문이하나 있었다. 믿음,소망,사랑 중 소망이 그것이었다.
기독교의 소망이 불교의 원력, 보살핌과 같이 순수한 이타심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기독교가 공동체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그것이 바로 소망의 영역임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탐진치 삼독을 해결하는 삼약으로 지혜, 자비, 원력을 꼽는다.
믿음,소망,사랑도 같은 기는을 하는 듯하다.
제럴드메이의 <영혼의 어두운 밤>에는 다움과 같은 구절이 있다.
'신비로운 말처럼 들리겠지만, 우리의 실존 한가운데에는 뭔가 멋진 것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타인을 향한 사랑, 피조물을 향한 사랑, 삶 자체를 향한 사랑이 그것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중도는 흑도 백도 아닌 어중간한 중간 상태가 아니다. 흑과 백이 분리되기 이전, 너와 내가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를 중도라 한다'
모든 종교가 그 깊은 본질에서는 동일할 것이라 믿는 이유도 '너와 내가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 를 짐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신분석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문화를 배경으로 기독교 지혜를 접목하고 있다.
정신 건강의 핵심인 양가성 통합을 말할 때 그 마지막에는 성과 속의 통합,
삶과 죽음의 통합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것은 영적 건강과 관련된 차원이었다. 불ㅛ의 불이, 유교의 중요, 도교의 태극 등이
모두 그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 천천히 살아도 마음이 편하다면 잘 살고 있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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