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기(氣)’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이것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어도 느낌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때의 의미를 분석해보면, 우주 보편적인 현상을 의미하는 철학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단순히 몸 상태를 의미하는 한의학적인 용어로 사용될 때가 대부분이다.
동양사회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자연스레 ‘기’라는 것에 친숙해져 있지만, 그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이처럼 우리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개념인데 서양인들에게는 오죽할까? 서양의 과학적 지식으로는 도저히 ‘기’의 정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니, 단순히 글자 그대로 번역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런 문제는 특히 한의사나 양의사 사이에서 더욱 증폭되는 경향이 있다. 현재 양‧한의사가 함께 진료하는 병원이 몇 군데 있지만 협진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양의사가 자신이 진단한 병명을 휘황찬란한 영어 필기체로 갈겨써서 한의사에게 전해주면, 그걸 본 한의사는 또 휘황찬란한 한자 초서체로 답신을 적어 준다. 아픈 사람은 똑같은데 어찌하여 서로가 다르다고 이야기 하는 것일까? 서로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아니 좀 더 효율적인 의료서비스를 위해 ‘기’에 대해 보다 객관적이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표현을 찾을 필요가 있다.
영영사전을 찾아보면, 기(氣)란 ‘한 인간의 신체에 존재하는 경락(經絡)의 망(網)을 따라 흐른다고 믿어지는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필수적인 생명의 힘’으로 정의돼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좀 더 자세히 분석해보자. 예를 들어 ‘기분(氣分)이 좋다, 나쁘다’라고 하는 것은 단지 외부 자극에 대한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영어의 ‘컨디션’과 같이 어느 정도 객관적인 신체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 ‘기절초풍(氣絶招風)하다’의 경우는 외부 자극으로 놀라 신체 내 기의 흐름이 급격히 막히게 돼, 그 후유증으로 벌벌 떠는 중풍이 온다는 뜻이다. ‘감기(感氣) 걸렸다’고 하면,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하다가 신체의 약화된 기의 흐름을 예민하게 느끼게 되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의 예를 종합해보면, ‘기’란 어떤 외부 자극에 대해 몸 안의 신경계가 반응하는 작용을 의미하는 것 같지 않은가? 이는 외부자극에 대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반응현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반응에 대응하는 역할을 하는 신체 기관은 바로 ‘자율신경계’다.
이번에는 보다 과학적인 논리를 만들어보자. 이 접근방식에는 전통의학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와 관련된 현대과학적인 추가정보(화학, 생물학 등)를 제공하는 무료공개 검색서비스¹⁾가 이용된다. 검색서비스에서 ‘목향빈랑환’이라는 전통처방을 검색해보자. ‘목향빈랑환’은 문헌에 따라 대소변비삽(大小便秘澁, 변비)이나 기체(氣滯, 기가 체했다, 즉 기가 막혔다는 병증)에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체와 관련된 분석결과다. 검색서비스를 이용해 기체와 관련된 처방을 통계적으로 분석하면 가장 근접한 군약으로 ‘귤피(귤껍질)’가 나온다. 귤피 구성성분을 살펴본 순간 필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매우 많은 성분이 자율신경계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사실이었다. 교감신경계 약물로서 아드레날린(부신피질 호르몬)으로도 알려진 노르에피네프린(Norepinephrine)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시네프린(Synephrine)을 비롯해, 부교감신경계 작용물질로 알려진 물질(Guanidin, L-Stachydrine 등)도 다수 발견됐기 때문이다.
자율신경계라 하면 고등학교 생물시간에 “교감신경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 동공이 커지고, 소화가 안 되고, 침이 마르고, 가슴이 뛰고…” 라고 외웠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동의보감을 찾아보면 귤피(진피, 陳皮)는 ‘가슴에 기(氣)가 뭉친 것을 치료하며 음식 맛을 나게 한다. 또한 기운이 위로 치미는 것과 기침하는 것을 낫게 하고, 구역을 멎게 하며 대소변을 잘 통하게 한다’고 나와 있다. 이 표현은 마치 자율신경계의 기능을 암기했던 구절과 흡사함을 느낄 수 있다.
만일 ‘기’를 자율신경계라고 한다면, 기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다른 현상도 고찰해보자. 기가 흐른다고 믿어지는 경락의 망과 그 연결점인 경혈의 존재는 무엇일까? 예컨대, 경혈에 침을 놓으면 자율신경계의 변화가 실제로 온단 말인가?
그렇다. 논문을 검색해보면 매우 많은 논문, 특히 일본에서 나온 논문들이 침구(鍼灸, 침질과 뜸질)를 할 경우 자율신경계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기술하고 있다. Sakai 등(Autonomic Neuroscience: Basic and Clinical, 2007)은 뇌파검사(EEG, Electroencephalogram) 측정을 통해 침구와 자율신경계의 변화가 상관성이 있음을 입증했다.
그렇다면 ‘경혈’은 자율신경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경험적으로 발견한 인체의 특정 감각신경의 분포부위를 이야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맛을 느끼는 혀의 부위가 다 다르듯, 신체의 감각기관은 균등하게 분포돼 있지 않다.
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보자. 우리가 기공(氣功)이나 요가, 단전호흡이라고 부르는 수행을 통해 스스로 기(氣)를 통제한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다. 2005년에는 원광대 이명수 교수 등이 심전도검사(EEC) 측정을 통해 기공치료가 자율신경계를 변화시킨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자율신경계도 도를 닦으면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간혹 어머니가 차에 깔릴 뻔한 아이를 구하기 위해 차를 들어 올렸다는 놀라운 이야기도 있지 않는가. ‘기’가 자율신경계라면 이 효과와 도인들의 신비로운 능력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고전의약서에 따르면 옛날 사람들은 인체를 하나의 소우주로 보았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우주의 오운육기(五運六氣)에 대응하는 한의학의 오장육부(五臟六腑) 이론 등이 나오게 된다. 이와 반대로 우주를 인체에 빗대어 표현한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기(氣)가 인체의 자율신경계라면, 이(理)는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체성신경계(감각, 운동신경계)라고 생각해보자. 실제로 이기론(理氣論)의 시작점인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분석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즉, 두뇌상태를 조절하는 이와 기의 실체 역시 그것을 조절하는 외부세계와의 연락망인 체성신경계와 자율신경계에 대비될 수 있다는 말이다.
현대생리학적으로 생각한다면, “이가 발하면 기가 이를 따르고, 기가 발하면 이가 기를 탄다”는 이황의 이기호발설은 “본인의 의지로 운동을 하면(이가 발하면) 심장박동의 증가 등 자율신경계의 변화도 동반되며(기가 이를 따르고), 몸이 떨리는 추위를 느끼면(기가 발하면) 운동을 해 추위를 극복(이가 기를 탄다)할 수도 있다”는 신체 변화의 표현처럼 보인다. 주기론(主氣論)은 ‘이’와 ‘기’가 같다는 이기일원론에 가까운데, 이는 생리학 측면에서 볼 때 맞지 않는다.
하지만 유교적 이상사회 구현을 중심에 두어 원칙을 지키려 했던 주리론(主理論), 현실사회의 역동성을 현실정치에 반영코자했던 주기론(主氣論) 모두 탁상공론은 아니었을 것이다.
글 : 이영득 박사/BOXEN LOHAS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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