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 도서관에서

박완서 마흔에 시작한 글쓰기 -양혜원 에세이-

아라모 2024. 2. 15. 21:10

 

 

박원서의 세대는 온 국민이 집단적으로 비범한 일을 겪어야 했고,

그래서 모두가 그저 전쟁 없이 평온하게 하루하루가 이어지는 지극히 평범한 일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

전쟁 때도 닫은 적이 없었던 학교 문을 전염병으로 닫는 것을 목격하게 된 오늘날,

우리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도 친구들끼리의 식사, 가족과의 만남, 여행의 즐거움과 같은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다.

그래서 역으로 정상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조건에 의해 마련되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 32p

 

박완서의 전쟁 소설들은 가까이 왕래하며 살던 이웃이 어떻게 서로를 고발하면서 인간의 밑바닥을 드러내는지,

어떻게 죄책감이 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지,

동족을 묻고도 태연히 밥을 먹을 수 있는 인간의 생존 본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등을 묻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한국전쟁의 틀에 들어가면, 결국 그래서 너는 아군이냐 적군이냐의 이야기로 단순화된다.

이웃이 하루아침에 적이 되는 이야기를 인류 역사 내내 인간을 고뇌하게 만든 문제이지만,

한국 전쟁에서 그것을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는 그 문제의 깊이로 들어가 제대로 애통의 서사를 구성하기 전에

한국 수난의 역사로 재빨리 재구성된다.

그리고 그 수난은 늘 외세의 탓이기 때문에 우리는 동질적 집단으로 묶어야 하고 그 안에서 다른 목소리는 차단된다.

박완서의 반복되는 이야기를 그렇게 차단당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 107p

 

소설가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자리에 올랐음에도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고 말하게 하는 스무 살 시절에 대한 그의 오랜 미련도,

나의 선택과 무관하게 주어진 불가항력적인 역사적 사건에 휩쓸릴 수밖에 없을 때

인간이 느끼는 무력감, 분노, 원한, 회한, 회의, 안타까움 등이 집적되어

끝내 풀 수 없는 문제로 남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국 전쟁을 둘러싼 무수한 논쟁들 속에서도 개인이 감당해내야 하는 트라우마의 무게를

진지하게 응시하며 인간 본원의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박완서가 인생 말년에 느낀 고독은 끝내 그 작업에서 동류를 만나지 못한 고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109p

 

박완서는 <한 말씀만 하소서>의 배경을 소개하는 도입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집 안방 아랫목 제일 높읕 자리엔 카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만한 작은 십자고상이 걸려 있습니다.

(중략)

제가 가장 자주 대하고 따라서 가장 많은 원망을 받고 언젠가는 내팽겨쳐지는 행패까지 당한

이 못 박힌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은 건 최근의 일입니다.

오냐 실컷 욕하고 원망하고 죽이고 또 죽이려무나, 네가 그럴 수 있으라고 나 여기 있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분의 표정은 생생하게 슬프고 너그러워 보였습니다.

이 일기는 똑같이 찍어낸 주물에 지나지 않던 성물과 이렇게 아무하고도 똑같지 않은 특별한 관계를 맺기까지의

어리석고도 고통스러운 기록의 일부입니다.            - 123p

 

우리는 흔히 염치를 아는 것이 인간됨의 도리라고 생각하지만,

이 염치를 거역하는 파렴치한 생명력에 오히려 인간됨의 근원이 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염치도 일단 존재하는 자에게 허락된 것이니, 염치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파렴치해질 수밖에 없다.

그 모순을 받아들이고, 생존을 위해 몸이 보내는 허기의 신호를 받아들이는 것이

산 자로서 발을 떼는 첫걸음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끼니때마다 고파오는 배가 한없이 부끄러웠지만,

생명의 그 능력을 거역하지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다시 산 자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 128p

 

마지막으로 박완서가 그 아름다움에 밤을 새웠다던,

독일 신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의 시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

여기에 다시 인용하는 것으로 이번 장을 마무리하려 한다.

인간의 고유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유의 비밀에 싸인 개인적인 세계를 지닌다.

이 세계 안에는 가장 좋은 순간이 존재하고 이 세계 안에는 가장 처절한 시간이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숨겨진 것

 

한 인간이 죽을 때에는 그와 함께 그의 첫눈도 녹아 사라지고

그의 첫 입맞춤, 그의 첫 말다툼도.....

이 모두를 그는 자신과 더불어 가지고 간다.

벗들과 형제들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으며,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이에 대하여 우리는 과연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참 아버지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라져가고.... 또 다시 이 세계로 되돌아오는 법이 없다

그들의 숨은 세계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아하 매번 나는 새롭게 그 유일회성을 외치고 싶다. - 136p

 

중년은 죽음의 관점에서 삶을 살기 시작해야 하는 때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미래에 내가 될 모습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갔다면, 중년부터는 죽음의 관점에서 현재를 살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방 뺄 날을 받아놓은 세입자의 생활과도 같을 것이다.

한 장 젊은 나이에는 내가 만약 죽는다면이라는 가정법으로 말할 수 있다면,

중년부터는 내가 죽을 때라고 스스로에게 이르며 사는 것이 좋은 노년을 준비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나 스스로 조용히, 내가 이 세상에서 방을 뺄 때 무엇을 챙겨 가고 무엇을 두고 가고 싶은지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다.         - 15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