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 도서관에서

피프티 피플 - 정세랑 -

아라모 2021. 10. 5. 14:12

정세랑의 장편소설 『피프티 피플』. 2016년 1월부터 5월까지 창비 블로그에서 연재되었던 작품으로 수도권의 한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느슨하게, 또는 단단하게 연결된 50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50개의 장으로 구성된 소설 속에서 병원 안팎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처한 곤경과 갑작스럽게 겪게 되는 사고들, 그들이 안고 있는 고민들이 흥미진진하면서도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낮고 넓은 테이블에, 조각 수가 많은 퍼즐을 쏟아두고 오래오래 맞추고 싶습니다. 가을도 겨울도 그러기에 좋은 계절인 것 같아요. 그렇게 맞추다보면 거의 백색에 가까운 하늘색 조각들만 끝에 남을 때가 잦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들어 있거나, 물체의 명확한 윤관선이 보이거나, 강렬한 색이 있는 조각은 제자리를 찾기 쉬운데 희미한 하늘색 조각들은 어렵습니다. 그런 조각들을 쥐었을 때 문득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모두가 주인공이라 주인공이 50명쯤 되는 소설, 한사람 한사람은 미색밖에 띠지 않는다 해도 나란히 나란히 자리를 찾아가는 그런 이야기를요 -작가의 말 중-

 

결혼은 그 나름대로의 노력이 계속 들어가지만, 매일 안도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마음을 다 맡길 수 있는 사람과 더 이상 얕은 계산 없이 팀을 이루어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 164p -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진 채 다친 동물처럼 실려온 여자들에게, 아이들에게 그 일이 이제 지나갔다고 말해주면서 1년이 갈 것이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또 바보 같은 소리를 할 테고, 거기에 끈질기게 대답하는 것도 1년 중 얼마 정도는 차지할 테다.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

- 266p -

 

 

가습기 살균제라니. 심지어 규익도 썼었다. 게을러서 한두번 쓰다 말았다. 누나는 게으르지 않아서 죽었다. 곰팡이와 세균을 싫어하는 사람이라서 죽었다.

- 270p -

 

시철은 곡기가 답답하다고 느꼈다. 보일러를 돌려봤자 열은 바깥으로 다 흩어지고 망할 텐트나 치고 살아야 하다니, 일어나서 텐트를 확 접어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보다는 설핏 잠이 들려하는 혜린을 깨워 묻고 싶었다.

우리도 그렇게 변하면 어쩌지? 엉뚱한 대삿에게 화내는 사람으로? 세상은 불공평하고 불공정하고 불합리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지쳐서 변하면 어쩌지?

- 305p -

 

그냥 ..... 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 선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

모르겠어요. 내 견해일 뿐이지만, 젊은 사람들은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지요. 당사자니까, 끄트머리에 서 있으니까. 그래도 오만해지지 맙시다. 아무리 젊어도 그다음 세대는 옵니다. 어차피 우리는 다 징검다리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하는 데까지만 하면 돼요. 후회없이

- 380p.381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