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 도서관에서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 - 고두현 -

아라모 2020. 3. 10. 19:35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

 

" 멈출 때마다 나는 듣네 "

신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사랑과 인생의 명시

 

그 날 거울 속에서 낯선 나를 발견하고는 오래 생각했다. 나는 누구인가. 무얼 위해 이토록 아등바등 살았는가.

시인들은 왜 "일에 쫓겨 허덕거릴 때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곁을 둘러보라"고 했을까.

멈추어야 새로운 것들이 보이고 들린다. 별스럽지 않은 풍경도 자세히 보면 달리 보인다. 직선의 세상을 둥글게 보듬어 안는 곡선의 미학이 그 속에 있다.

 

젊을 때는 '뭘 몰라서' 바쁘고, 나이 들어서는 '어중간하게 알아서' 부산하다고 한다. 하지만 시를 읽을 때는 마음이 편해진다. 표정도 순해진다. 20~30대나 40~50대나 마찬가지다. 저마다 시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시공의 경계를 떠나 미처 경험하지 못한 생의 순간들을 간접체험하기도 한다.

우리 모두 가슴 뛰는 시를 만나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머리말 중에서

 

떠나는 내게

머무는 기대에게

두 개의 가을   - 마사오카 시키(근대 하이쿠의 아버지)

 

내 나이 스물 하고 하나였을 때

  -앨프레드 에드워드 하우스만-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

지혜로운 사람이 들러준 말,

"돈일랑 은화든 금화든 다 주어도

네 마음만은 함부로 주지 말아라.

보석일랑 진주든 루비든 다 주어도

네 순수한 마음만은 잃지 말아라."

그러나 내 나이 스물 하고 하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어라

 

내 나이 스물 하고 하나였을 때

그 사람이 다시금 들려준 말'

"가슴 밑바닥에서 나오는 마음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란다.

그 사랑은 숱한 한숨과

끝없는 후회 속에서 얻어지느니."

내 나이 이젠 스물 하고 둘

오, 정말이어라, 정말이어라.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에밀리 디킨슨-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 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부부  -함민복-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하고 상을 내려놓어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첫마음   -정채봉-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개업 날의 첫 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

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

 

세례 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나던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