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 도서관에서

시인의 밥상 - 공지영 에세이 -

아라모 2018. 9. 16. 23:49

시인의 밥상 공지영 에세이


버들치 시인은 거기서 시를 하나 낭송했다. 젊은 날 이 나무를 보고 쓴

[아름다운 관계]라는 시였다.


"그 작은 것이 뿌리를 내리다니

 비가 오면 바위는 조금이라도 더 빗물을 받으려

 굳은 몸을 안타깝게 이리저리 틀었지

 사랑이었지........  "


나는 귀를 의심했다. '아름다운 관계'라는 제목부터 좀 의아했는데

여기서 몸을 뒤트는 것은 소나무가 아니라 바위인 것이다.

더운 내 등으로 찬 소름이 지나갔다. 태고부터 거기 있어온 바위가 잘못 내려앉은

그 어린 소나무를 위해...인 것이다.

어린 소나무가 불굴의 의지로 바위를 뚫는 것이 아니라 늙은 것이 어린 것을 위해

필사의 힘을 다해 생명을 키워내는 이야기로 시인은 이 관계를 읽었던 것이다.

아직도 무언가를 극복하고 뚫고 그런 것에 감탄하고 있던 나에 비해 그는 이미

내어주고 죽어주고 갈라짐을 견디는 바위에 주목했던 것이다. 낭송은 이어진다


"사람들은 모르지 처음엔 이끼들도 살 수 없었어

 아무것도 키울 수 없던 불모의 바위였지

 작은 풀씨들이 날아와 싹을 틔웠지만

 이내 말라버리고 말았어

 돌도 늙어야 품 안이 너른 법

 오랜날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지

 그래 아름다움 일이란 때로 늙어갈 수 있기 때문이야."



"사람은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바라본 것을 닮는다. 내가 죽을 때

 바다를 닮은 얼굴이 되어 있다면 좋겠으나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다.

 최소한 빈 술병이라도 닮기를 희망한다"

- 한창훈<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


그러니까 우리 나이로

육십, 예순, 이순,

내가 이 나이를 먹었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잘 견뎌주었구나

다른 이들의 주관적, 객관적인 평을 떠나

스스로의 몸과 영혼에 대견하고 흐뭇하기도 하고

(고백곤대 자꾸 똥배가 나오는 것에 대한

심한 부끄러움과 이에 대한 도의적, 존재적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

궁금했었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의 눈처럼

불혹의 사십, 그 얼굴이 궁금했으며

지천명의 얼굴이, 이순의 얼굴이 궁금했다

더듬어보니 사십의 나이가 되던 그 전날 밤에도

불을 끄고 잠들기 전 거울을 보고

눈을 뜬 아침

제일 먼저 거을을 보며 흠~

어제와 다를 바는 없지만 불혹의 얼굴이 이렇게 생겼단 말이지

이 불혹의 얼굴을 기억해야지

그랬던 것이다

오십에도

육십에도....

눈보라가 치던 날 없었겠는가

비바람이 불고 때아닌 우박이 내리기도 했으며

눅눅한 장마의 습기와

꿈틀거리는 욕망과 무너지는 영혼의 폐허와

증오와 분노와 적개심과 시기심과 탐진치의 늪에 빠져

허우적재던 날들

불면을 이루던 문학적 열정과 갈망과

존재에 대한, 아니 그 부재에 물음과 방황의 숲을 헤매던 날들

아직 한겨울, 매화꽃이 피었다

누군가는 철없음을꾸짖고 누군가는 고고한 기개를 배운다

내게 저 엄동의 매화가 피며 나태한 정신을 꾸짖지 않았더라면

내게 온몸으로 고통을 통과하며

향기를 깨워내는 한잔의 차가 곁에 없었더라면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고맙고 따뜻하게 들리지 않았더라면

이순의 강, 건너오지 못했을 것이다

예순 살, 올해는 또 어떤 일들이 내게 올까

나는 또 어떤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가고 그 길의 인연들을 만날까

다가오며 다가설, 걸어오며 걸어갈 길과 길에서의 인연들이여

내 몸과 영혼이 작고 가벼워질 때까지

-지리산 행복학교 버들치시인-